독서공모전

행사명
[공모전]제4회 북삼매 북리뷰공모전
행사일
2018-10-31 17:00 ~ 18:00
접수기간
2018-09-10 ~ 2018-10-19
행사장소
중앙도서관 3층 컨퍼런스룸
신청인원/정원
2명 /100명
대상
본교 학부재학생

내용

 

후기

최일우 2018-11-05 추천(0)
[문화와예술부문 우수] 세일즈맨의 죽음
국어교육과 4 박*지



 


이 책의 배경을 ‘2018년, 한국’으로 바꾸고 ‘윌리’는 대기업 영업부의 만년 ‘김 과장’으로 직접 외근까지 뛰는 인물, 아들 ‘비프’는 20대의 백수, ‘하워드’를 젊은 재벌 3세, ‘찰리’를 잘 나가는 기업의 임원 정도로 재설정하여도 원작의 갈등 양상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 즉 ‘윌리’의 삶은 흘러간 시대의 보편적인 삶이 아니라 여전히 현대인도 앓고 있는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그렇다면 윌리와 매우 흡사한 우리의 인생은 결국 비극으로 끝나게 되며, 실패한 인생을 살 수 밖에 없는 운명인가 질문해 보게 된다. 그의 비극이 도대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으며 인생의 실패자라 할 수 있는가 생각해 본다면 삶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지표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윌리는 자신이 무엇을 소유하고 있는지를 중시하는 인물이다. 주택 융자를 평생에 걸쳐 갚기 위해 노력해왔고, 이제는 낡아빠진 자신의 냉장고 대신 ‘광고를 많이 하는’ 멋진 ‘헤이스팅스’ 냉장고를 죽기 전에 단 한 번만이라도 가져보기를 원한다. 그의 원대한 계획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는 아내 린다에게 죽기 전까지 시골에 손님을 재울만한 여유가 있는 집을 장만해서 채소와 닭을 키우며 여생을 보낼 것이라 다짐한다. 이러한 욕망은 오늘날에도 별반 다르지 않다. 직장에 들어가 돈을 벌고, 그 돈으로는 절대 살 수 없을 집을 은행에서 돈을 빌려 결국 마련한다. 여유가 있다면 기왕이면 남들이 아는 브랜드의 아파트가 좋을 것이다. 보다 경제력이 있다면 그 아파트의 넓은 평수에서 특정 브랜드의 가구와 TV, 냉장고 등을 가지기를 원할 것이다.







이처럼 남들과 차별화되기 위한 항목들은 끝없이 세분화할 수 있다. 거기에 광고에서는 기능면에서 큰 차이가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그것을 구매하는 순간 소유한 자신이 더욱 멋있어질 것이라 유혹하는 상품들을 쉬지 않고 선보인다. 이쯤 되면 내가 정말로 가지고 싶은 물건인지, 이것은 당신이 반드시 소유해야 할 ‘잇 아이템’ 이라는 확신을 광고로부터 주입받아서 생긴 필요인지 구별하기 힘들어진다. 꼭 필요할 것같아 구입해 두고는 몇 번 쓰지도 않고 구석에서 먼지만 쌓여가는 모습을 발견한 경험은 누구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결국 세뇌된 소비의 굴레 안에서 윌리와 같이 고군분투하며 더 많이, 더 좋은 것을 가지지 못해 절망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이켜 본다.

 





윌리의 인생을 사회적 지표로 바라본다면 결코 최악의 상황은 아니다. 오히려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는 위치이다. 젊은 시절부터 헌신해 온 직장이 있고, 한때는 환영받는 세일즈맨이었고 아내와 두 아들도 있으며 주택 융자를 다 갚은, 몸을 뉘일 수 있는 온전한 ‘내 집’도 있다. 그러나 윌리는 끝없이 경쟁적인 위치에 자신을 놓았고 남들보다 우위에 올라서는 것에 인생의 중점을 두었다. 그리고 그를 그렇게 치열한 경쟁 속으로 밀어 넣은 사회가 있었다. 그 속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의 관계는 실패한다는 점이 그가 자살에 이르게 되는 가장 큰 원인으로 꼽을 수 있다. 이 작품에서 도드라지는 갈등은 아버지 윌리와 아들 비프 사이에서 일어난다.







윌리에게 아들은 어떤 의미인가. 바로 자신의 미래이면서 동시에 차마 마주하고 싶지 않은 비참한 현실이다. 실은 윌리도 아들이 자신의 기대와는 다르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인정하면 경쟁에서 뒤처진 열등한 부자(父子)로 스스로 낙인찍는 것과 동일하기에 현실을 부정하고 회피하려 하는 모습을 보인다. 아들 비프 역시 처음부터 비관적인 태도로 사는 인물은 아니었을 것이다. 현재 우리 사회와 마찬가지로 평범한 삶의 틀에 맞추지 못하는 개인은 사회적으로 배제하고 낙오자로 느끼도록 만드는 사회가 배경이 된다. 이 속에서 비프는 수많은 거절과 자신이 특별하지 않다는 좌절을 겪으며 자존감이 바닥으로 추락하게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사회적인 성공을 바라는 아버지와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아들의 관계는 지금도 낯설지 않으며 세대 간의 갈등의 주요 원인이다.







이러한 갈등의 일차적인 책임은 한 개인을 사회가 취급하는 태도에 있다. 이를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은 세일즈맨 윌 리가 직장에서 해고당하는 부분에 잘 나타나 있다. 윌리는 선대 회장 시절부터 입사하여 현 회장의 ‘하워드’라는 이름까지 지어준 충실한 사원이지만 더 이상 뛰어난 실적을 내지 못하고 회사의 애물단지로 여겨진다는 이유로 해고당한다. 세일즈맨으로서 그의 경륜이나 신뢰보다는 실적만이 그를 평가하는 유일한 지표이다. 자긍심을 가지고 평생을 바친 일이 인정받지 못하는 부조리,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더 이상 내일에 희망이 없는 삶, 최소한의 안정을 보장하지 못하는 불안감을 조성하는 경쟁적인 사회적 구조가 가족과의 관계마저도 파괴하는 이유이다.

 





세일즈맨의 비극적인 죽음은 우리에게 몇 가지 의미를 생각해보게 한다. 무엇이 성실하고 평범한 세일즈맨을 죽음에 이르게 하였고, 그의 죽음이 남긴 것은 무엇일까? 윌리는 반복해서 ‘씨앗’을 심어야 한다고 말한다. 아무것도 심은 것이 없다며 불안해한다. 그의 불안함을 자극하는 것은 반복적으로 머릿속에 떠오르는 ‘벤’의 대사이다. 치열한 경쟁에서 승리하여 부유한 삶을 사는 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다이아몬드를 꺼내오려면 정글 속으로 들어가야만 하지.’ 그러나 정글 속으로 들어간 모두가 다이아몬드를 꺼내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정글은 약육강식의 세계로, 나약한 존재로 인식되는 순간 포식자에게 희생된다. 윌리는 벤의 말에서 ‘다이아몬드’에만 집중한다. 이는 윌 리가 계속해서 경쟁에서 성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끊어내지 못하고 죽음도 불사하게 만드는 달콤하면서도 강력한 유혹이다. 그의 죽음에서 우리는 ‘정글’에 들어가기를 거부하라는 경고를 읽을 수 있다. 알베르 까뮈는 <시시포스의 신화>에서 부조리한 일상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으로 ‘행복한 시시포스’가 되기를 말한 바 있다. 단순히 신의 명에 따르는 수동적인 시시포스가 아니라 자신이 굴려할 돌이 비탈을 따라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내가 할 일이 지속되는 것을 기뻐한다면 시시포스의 불행을 바라는 신의 의도를 오히려 배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까뮈는 시시포스에게서 부조리한 상황에서도 자유 의지로 맹렬히 저항하며 삶을 살아내는 적극적 인간을 발견해낸다. 바위를 굴리는 시시포스와 씨앗을 심는 윌리를 연관 지어 보면 시시포스는 굴려야 할 바위를 숙명적으로 부여받은 반면, 윌리는 어떤 씨앗을 심을 지 선택할 수 있었다. 자신이 굴릴 바위를 선택할 수 있는 시시포스인 것이다. 그가 선택한 바위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세일즈맨의 인생이었다. 한편 그의 죽음 후에 아들 비프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좋은 시절이 참 많았어요. 출장에서 돌아오셨을 때, 일요일에 현관 계단 만들 때, 지하실을 완성할 때, 새 현관 만들 때, 욕실을 하나 더 만들 때, 그리고 차고 만들어 넣을 때. 찰리 아저씨, 아버지는 그 모든 세일즈 일보다 현관 계단 만드는 데 더 정성을 쏟았답니다.’







결국 윌리가 인생에서 진정으로 행복했던 순간은 가족과 함께 할 공간을 꾸려나가는 시절이다. 만약 그가 이러한 순간을 굴려야 할 삶의 바위이자 심어야 할 씨앗으로 선택했다면 정글에 들어가지 않고도 또 다른 다이아몬드를 찾아낸 행복한 시시포스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최일우 2018-11-05 추천(0)
[문화와예술부문 우수] 세일즈맨의 죽음
법학과 4 우*영



 


주인공 윌리는 65세의 늙고 지친 세일즈맨이다. 그는 가장으로서 정글과도 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끝내 자살을 택하고야마는 비극적 인물이다. 그가 꿈꾼 것은 화려한 아메리칸 드림이었지만, 그가 이루어낸 것은 30여 년을 헌신한 회사의 해고통보와 마지막 주택 융자 할부뿐이었다. 그는 참담한 현실을 직시하지 못했고, 열심히 노력한다면 부자가 될 수 있다는 rags to riches (넝마에서 부자로) 라는 캐치프레이즈를 좇으며 희망을 품고 있었던 과거로 자꾸 달아나려 한다.

 





큰 꿈을 꾸었지만 그를 이루지 못한 윌리는 자신의 아들 비프에게 큰 기대를 건다. 멋진 외모와 미식축구 선수로서 전도유망한 아들. 윌리는 자신의 삶의 지표였던 아메리칸 드림을 비프에게 투영시킨다. 외모와 개성, 인맥만 있으면 성공할 수 있다는 그의 비뚤어진 성공 철학을 가르쳤으며, 수학 공부를 해야 한다는 버나드를 쫓아내거나 공을 훔쳤다는 것을 알면서도 용기라고 포장하는 등 비프의 비틀어진 성장에 일조한다. 심지어 자신의 우상과도 같았던 아버지의 외도를 목격한 비프는 어긋나기 시작했고. 결국 비프는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 어른이 되고 만다.

 





윌리의 허망한 인생을 되돌아봤을 때 남은 것은 가족과 낡은 살림살이 뿐이다. 한량같이 굴며 듬직한 구석은 하나도 없지만, 아버지의 인정을 받으려 애쓰는 두 아들과 사랑과 존경으로 헌신하는 아내, 일자리를 제안하는 친구의 존재는 그의 일생은 최악은 면하게 해주는 유일한 위안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구입한 지 오래 된 그의 집 가구들을 살펴봤을 때는 씁쓸함이 더 크다. 할부로 샀던 냉장고, 자동차, 낡고 볕조차 잘 들지 않는 집뿐인데, 그마저도 고장이 났다거나 예전만큼은 못하는, 생명이 끝난 것들이었다. 아메리칸 드림을 좇아 온 그의 인생이 빛이 바랬듯, 그의 살림살이를 비롯한 몇 없는 재산마저도 빛을 잃은 것이다.

 





윌리 “내 인생에 한 번이라도 좋으니 고장 나기 전에 내 것으로 가져봤으면 좋겠네! 만날 고물만 내 차지야! 막 자동차 할부가 끝나니 폐차 직전이지. 냉장고는 미친 듯이 벨트나 닳아 없애고 있어. 그런 물건들은 유효기간을 정해 놓고 나오나 봐. 할부가 마침내 끝나면 물건도 생명이 끝나도록 말이야.”



가족들을 위해, 경제적 부를 위해 열심히 노력하며 살아온 그의 인생은 낯설지 않다. 아버지와 형과 같이 개척자로서 도전적이고 화려한 삶을 포기하고 세일즈맨으로서 살 것을 선택한 이유는 ‘가족’이었다. 가족을 위해 뭔가를 포기하고 성공을 꿈꾸는 것은 어느 시대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모습이다.

 





소시민의 비극을 보여준다는 평을 받는 이 이야기가 시공을 뛰어넘는 명작으로서 많은 이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명작이라는 것은 꽤 슬픈 일이다. 1940년대의 사람은 이랬구나가 아닌 지금 우리가 뼈저리게 공감할 수 있는 접점이 많다는 것, ‘세일즈맨의 죽음’이 보여주는 가난한 가장의 결말이라는 것은 현대인에게도 충분히 일어날 법한 일이라고 납득하게 되는 것이 이 비극이 주는 또 다른 감상이다. 주인공의 성 Loman이 ‘지체가 낮은 사람 low man’이라는 뜻이 담겨있다는 것도 유의할 점이다. 윌리와 같은 소시민의 비극은 가장 보편적이며, 친숙하다. 하물며 오늘날 21세기의 한국사회에서도 통용된다.

 





성공에 대한 기대로 부풀었던 윌리는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살아야 한다는 압박감으로 거의 하루를 길 위에서 보내곤 했다. 우리는 그렇게 살고 있는 사람들을 아주 잘 알고 있다. 바로 우리다. 초중고라는 장장 12년의 교육을 마치고 상당한 비용을 치르고 남들 다 가는 대학을 간다. 대학 에서는 학문을 위해 정진하는 것보다는 사회에서 쓸모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을 배운다. 사회에서 쓸 수 있는 능력을 보여주기 위해 자격증을 따고, 인턴을 한다. 자기소개에서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사실적으로 기입하는 것 보다는 그들의 요구에 따라 재단된 만들어진 내가 선보여지게 된다. 우리는 세상에 ‘나’라는 사람을 팔고 있는 세일즈맨인 것이다. 작가 밀러가 로먼이 무엇을 팔았냐는 질문에 ‘세일즈맨은 자신을 판매하는 것’이라고 대답했다는 일화를 떠올리면 우리와 윌리의 공통분모가 하나 더 늘어난다.

 





윌리와 21세기 윌리들의 치열한 삶은 무엇을 위한 것일까? 바로 ‘성공’이다. 근면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아메리칸 드림이 심어준 헛된 기대는 지금까지도 유효하다. 성공하면 무엇이든 해결된다는 성공의 신화에 현혹된 우리는 삶의 애초에 우리가 설정한 삶의 방향과는 조금 다르게 흘러간다. 가족의 행복이라는 근본적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성공을 좇았지만 결국엔 물건들에 대한 빚을 갚기 바쁜 삶으로 전락해버린 윌리의 이야기도 같은 맥락이다.







성공을 향해 달리던 우리는 사회가 사람보단 물질을 우선한다는 것, 어떻게든 승리를 쟁취해야 한다는 약육강식의 질서와 다른 사람을 짓밟아야만 성공을 쟁취할 수 있다는 경쟁주의를 기반으로 한 자본주의 앞에서 우리는 좌절하고 만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성공은 결코 모두에게 허락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꿈을 위해 긴 시간을 달려왔건만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의 무력감, 억울함, 자책… 현실과 이상의 괴리는 좁혀질 낌새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윌리는 자신이 선택한 꿈을 고집스럽게 밀고 나갔다. 가족을 위해서, 남자라면 세상에 무엇인가는 더해야한다는 일념으로 그는 자살을 선택한다. 노력하면 주어질 줄 알았던 성공 대신에 그가 손에 쥘 수 있었던 것은 ‘죽음’이었다.

 





윌리의 죽음은 우리에게 수많은 물음표를 남긴다. 그는 잘못된 선택을 한 것인가? 그는 피해자인가? 이 소시민의 비극을 온전히 개인의 탓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는 좋은 가장이었다고 할 수 있는가? 성공의 기준은 무엇인가? 윌 리가 추구한 성공만이 유일한 ‘성공’인가? 자본주의는 나쁜가? 윌리의 삶은 어떤 평가를 받을 수 있는가? 여러 질문 중 마지막 질문에 대한 답을 논해보고자 한다.

 





윌리의 고집스러운 죽음과 그의 평생의 지표가 된 성공에 대한 욕망으로 그를 비난할 수는 없다. 그렇게 열심히 산 사람의 가치가 2만 달러라는 것이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꿈의 가치를 인정해주지 않는 사회, 소수에게만 성공이 보장되는 사회에서 허락되지 않은 것을 이루고자 했던 것이 그의 잘못이라면 잘못일 것이다. 오늘 날에도 역시 자본주의 질서가 주를 이루고 있으니만큼 제 2의 윌리, 제 3위의 윌리가 등장할 가능성은 크다. 다시 말해 윌리와 같이 신기루 같은 성공을 좇는 사람들은 여전히 존재하는데, 그를 죽음을 이끌었던 것들이 우리를 죽음으로 이끌고 가지 않을 거라고 그 누가 확신할 수 있는가? 세일즈맨의 죽음이 보여주는 세상과 오늘날의 모습이 별반 다르지 않아 비극은 얼마든지 되풀이 될 수 있다.

 





윌리 “집을 사려고 평생 일 했어. 마침내 집이 생겼는데 그 속에 사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거요.”


  

 

최일우 2018-11-05 추천(0)
[문화와예술부문 우수] 위대한 개츠비
불교학과 1 한*일



[성과 속]





‘성과 속’이라는 단어를 들어봤는가? 예술과 종교의 단골 주제이자, 종교학자 엘리아데가 쓴 책 제목이기도 하다. 말 그대로 ‘성’과 ‘속’에 대한 단어다.

동국대학교를 거닐며 수많은 보도블럭을 밟았다. 특별할 것 하나 없는 보도블럭이다. 보도블럭을 뽑아서 강의실로 들고 가보자. 교수님이 “자네, 그 더러운 보도블럭은 왜 들고 왔는가?”라며 의아해할 것이다. 맞다. 보도블럭은 더럽다. 보도블럭은 ‘속’이다. ‘속’에는 세속적이고 더럽다는 의미가 있다.







하지만 보도블럭을 잘 조각하여 불상을 만든다면 어떨까? 잘 만들어진 보도블럭 불상을 우리 학교 정각원에 갖다 놓는다면? 사람들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절을 할 것이다. 스님들은 목탁을 치며 예경을 할 것이다. 사람들은 무언가로부터 구원의 모티프를 보는 순간 ‘성’스러움을 느낀다. 설령 그것이 원래는 보도블럭이었을 지라도 말이다. 보도블럭이 불상이 되는 순간 그것은 ‘성’이 된다.







[닉 캐러웨이의 ‘속’스러운 시선]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의 주인공은 개츠비지만, 전체적인 이야기는 작중 화자인 닉 캐러웨이의 시점으로 진행된다.

닉 캐러웨이(이하 ‘닉’)는 자기 자신에 대해 ‘상상력이 결여돼 있고 세상 만사를 회의적으로 접근’하며 ‘촌스러운 결벽증’을 가지고 있고, ‘생각이 느리고 욕망에 브레이크를 거는 내면의 규칙이 많은 사람’이라 설명한다. 이러한 성향을 가진 닉의 ‘오만한 시선으로 다른 인간을 내려다 보는 행보’가 소설 전반에 걸쳐 끊임없이 계속된다.

닉은 타인의 ‘속’스러운 점들을 냉철하게 간파한다. 타인을 평가할 때 절대 후한 점수를 주지 않는다. 닉의 시선으로 소설 속 대표 인물들을 보면 결코 좋은 인상이 들지 않는다.







먼저 닉의 사촌 동생이자 작품의 홍일점 데이지에 대해선 ‘속물근성의 냄새로 가득한 세계’에서 ‘하루에 대여섯 명의 남자들과 대여섯 번의 데이트를 계속하는’속스러운 여자라 평가한다.

데이지의 남편이자 닉과 대학 시절부터 친분이 있는 톰 뷰캐넌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바람둥이에 인종차별주의자다.

여성 프로골퍼인 조던 베이커는 준결승전에서 나쁜 자리에 놓여 있던 공을 슬쩍 옮긴 의혹을 받는다. 닉은 베이커에 대해 ‘교정이 불가능한 거짓말쟁이’라 평가한다.







주요 인물들이 죄다 ‘속’스럽다. 이뿐만이 아니다. 닉은 특유의 결벽증 적인 시선으로 개츠비의 파티에 참석한 손님들의 속스러움을 분석하는데, 이는 무려 네 페이지에 걸쳐서 서술된다. 이쯤에서 알 수 있다. 닉은 책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의 역겹고 메스꺼운 부분을 기어코 들춰낸다. 속스러운 부분을 간파하며 타인에 대해 결코 좋은 평가를 하지 않는다.





[위대한 성 개츠비]





성 아우구스티누스, 성 토마스 아퀴나스, 십자가의 성 요한…. 속스러운 세상 속에서 성스러운 성을 이끌어낸 성인들이다. 이런 성스러운 인물들에겐 경외와 찬탄의 의미로 이름 앞에 ‘성’을 붙여 부른다.

개츠비의 경우엔 어떨까? 개츠비는 ‘속’의 최상승가도를 달리는 인물이다. 아무 경력도 없는 무일푼의 청년 제임스 개츠는 매주 성대한 파티를 여는 ‘제이 개츠비’가 되기까지 굉장히 속스러운 여정을 거쳤다.







이름도 속이고, 신분도 속이고, 학벌도 속였다. 개츠비가 쌓아 올린 부의 이면엔 ‘주류 밀수업’이라는 정당하지 못한 수단이 있었다.

닉은 개츠비의 거짓말을 단숨에 간파한다. 닉은 개츠비를 속스러운 인간으로 본다. 하지만 나중에 가서는 자신의 판단을 뒤집는다.

작중 인물들은 모두 속스럽게 행동한다. 개츠비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개츠비의 속스러움은 다르다. 개츠비의 모든 속스러운 행동은 ‘사랑’이라는 숭고함을 위해서였다. 개츠비는 사랑하는 사람의 죄를 대신 뒤집어쓸 정도로 사랑 앞에서 속을 찾지 않았다. 모두가 속스러움이라는 진흙 속에 허우적거리며 익사할 때, 오로지 개츠비 혼자 진흙 위에 핀 연꽃처럼 사랑을 꽃피웠다.







“다들 썩었어.” 닉이 개츠비를 향해 외친다. “너는 그 빌어먹을 인간들 다 합친 것보다 더 가치있는 인간이야.”

개츠비는 속스럽지 않았다. 모든 행동이 ‘성’스러웠다. 닉은 속스러운 욕망으로 뒤덮인 세상 속에서 ‘개츠비’라는 희망과 구원의 모티프를 보았다.







억지스러운 분석이라 생각되겠지만, 작가인 F.스콧 피츠제럴드도 개츠비를 희망과 구원의 모티프로 묘사했다. 피츠제럴드는 닉의 시점에서 멀어져가는 개츠비의 모습을 ‘그가 입은 화려한 핑크색 정장이 흰 계단을 배경으로 밝은색 반점처럼 남은 모습’이라 묘사했다. 이는 상징적 관점에서 보면 연금술의 ‘현자의 돌’을 상징한다. 화학적 의미의 근대 연금술이 아니다. 중세 기독교 신비주의의 가르침인 연금술을 의미한다. 기독교 신비주의에서는 인간의 내면에서 진행되는 신비적 변화 과정을 연금술이라 부른다. 여기서 말하는 금은 성자의 지혜와 희망과 구원을 상징하는 ‘현자의 돌’이다.







현자의 돌은 인간의 내면에서 신비적 변화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다. 신비적 변화 과정은 욕망에서 시작된다. 연금술사는 검은색으로 상징되는 인간의 욕망을 ‘헤르메스의 그릇(마음의 그릇)’에 넣고 흰색으로 정화를 시킨다. 흰색으로 정화된 욕망 속에서 주먹만 한 붉은색 반점이 떠올라 돌처럼 굳는다. 이 붉은색 돌이 바로 현자의 돌이다. 흰 계단에서 분홍색 정장을 입은 개츠비의 모습을 멀리서 본 닉의 시점에선 개츠비가 ‘현자의 돌’이다.







이러한 분석이 장난스러운 속임수처럼 보이겠지만, 서양의 예술가들이 연금술의 매혹적인 상징을 자신의 작품에 은밀히 감추는 일은 예로부터 종종 있었다. 이러한 피츠제럴드의 의도를 간파한 사람이라면 개츠비에게 ‘성’이라는 칭호를 붙여줄 것이다.







[예수와 개츠비]





『위대한 개츠비』에는 욕망을 좇는 많은 등장인물이 나온다.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인간의 욕망을 이처럼 잘 표현한 작품이 또 있을까? 소위 ‘속물’이라 불릴만한 인물들이 총출동하여 개츠비의 집에서 축제를 벌인다. 피츠제럴드는 마치 카니발을 연상케 하는 축제 속에 기묘한 문학적 장치를 숨겨놓았다.







카니발은 기독교의 사순절 이전에 벌어지는 즐거운 축제다. 사순절은 예수가 광야에서 40일간 금식하며 시련을 겪은 일을 기리는 기간이다. 사람들은 사순절 동안 고기를 끊고 경건하게 예수의 고난을 기린다. 이 경건한 기간 이전에 즐거운 기간을 갖는 축제가 바로 카니발이다.







카니발의 정점은 사순절 이틀 전인 ‘로즈 먼데이(Rose Monday)'다. 이날 거리에는 세계에서 몰려든 수많은 관광객이 화려한 의상을 입고 퍼레이드를 하며 파티와 노래, 춤 등을 즐긴다. 피츠 제럴드는 로즈 먼데이를 작품 속에 숨겨놓았다.『위대한 개츠비』에서 개츠비와 데이지는 전 세계의 문화양식을 진열해 놓은 듯한 개츠비의 집을 둘러본다. 개츠비는 엄청난 크기의 에나멜 장롱을 열어 전 세계에서 수집한 자신의 셔츠들을 데이지에게 보여준다. 데이지는 셔츠에 얼굴을 파묻고 “너무, 너무 아름다운 셔츠들이야. 너무 슬퍼. 한 번도 이렇게, 이렇게 아름다운 셔츠들은 본 적이 없거든.”이라며 펑펑 운다. 마치 로즈 먼데이 이후에 시작될 ‘개츠비의 사순절’을 슬퍼하듯이 말이다. 이쯤 되면 눈치를 챌 것이다. 작가 F.스콧 피츠제럴드는 개츠비를 자본주의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의 욕망을 대속한 ‘현대판 예수’로 묘사한다.





모든 사람들이 욕망을 좇는 자본주의 속에서 진정한 사랑을 좇은 위대한 개츠비. 개츠비는 오늘날 욕망을 좇는 현대인들에게 구원의 길을 보여줌으로써 ‘위대한 개츠비’가 되었다.

철학자의 장미정원(Rosarium philosophorum)에서 장미꽃 한 송이를 따와 위대한 ‘성 개츠비’의 무덤 앞에 헌화하며 리뷰를 마친다.


 
최일우 2018-11-05 추천(0)
[문화와예술부문 최우수] 세일즈맨의 죽음
사회학과 4 김*일

 



“오렌지 속만 까먹고 껍데기는 내다 버리실 참입니까. 사람은 과일 나부랭이가 아니지 않습니까!” 30여 년을 한 회사를 위해 일한 윌리 로먼은 자신보다 한 세대는 밑인 하워드 사장에게 이렇게 항변한다. 그러나 윌리가 자신의 거취를 의논하기 위해 하워드를 찾아갔을 때 그는 녹음기에만 빠져 있었다. 정년의 나이가 다 돼가는 윌리가 이제 외판직을 그만두고 뉴욕에서 일 할 수 있게 해달라 간청했지만 하워드는 “그렇지만 장사니까 자신의 역할은 다 해야 하죠.”라는 대답으로 대화를 일축한다. 이 장면에서 산업화의 산물을 상징하는 녹음기만 만지작거리고 있는 하워드는 현대 기계 문명에 몰두하는 자본가 집단을 대표한다. 반면 그 녹음기가 무엇인지조차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는 윌리는 후기산업사회에서 정보통신 발달에 적응하지 못하는 일반 세일즈맨의 표상이 된다. 더욱이 인간성이 탈락된 기계 문명은 냉혹한 상업주의적 가치관과 맞물려 윌리의 구시대적 가치관을 압살하고, 사회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개인을 세계의 논리에서 분리해버린다.

 





물론 윌리가 변화하는 세계에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인물은 아니다. 극의 전반에 나타나는 윌리의 언행은 자본주의 시대에 살면서도 구시대의 전통적 가치에 집착하며, 시대착오적으로 그려진다. 때문에 일부 독자에게 윌리 로먼은 용서할 수 없는 인물임에 분명하다. 아내에게는 권위적인 남편이고, 자식에게는 일방적으로 계도적 교육만을 일삼는 불통(不通)의 아버지이다. 아들과의 대화(사실상 훈계)에 부인 린다가 끼어들기라도 하면 조용히 하라고 윽박지르는 괴팍한 노인이다. 현실적 조언을 하는 이웃집 친구를 대놓고 무시하며, 폭압적인 말도 서슴지 않는다. 심지어 젊은 시절 출장 중 외로움과 영업의 힘듦을 핑계로 바람을 피고, 그 모습을 자식에게 들키기까지 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극 전반에서 그는 정신분열증을 의심할 만한 말만 한다. 희곡임을 감안하더라도 그의 대사는 현실과 공상을 뛰넘는다. 의식의 흐름처럼 한 주제를 일관되게 말하지 못한다. 마치 그만의 세계에 빠져 있는 듯하다. 놀라운 점은, 그 와중에도 그가 고집하는 것은 아들의 성공이라는 것이다. 사장이 되는 것만이 ‘성공’이라고 확신한다. 삶의 마지막 에서조차 그는 그 믿음을 놓지 않았다. 자식에게 보험금이라도 남겨주고자 차 사고를 가장해 자살 했지만, 아들은 떠난 뒤였다.







그러나 작가가 보여주고자 한 세일즈맨의 ‘죽음’은 윌리 개인의 죽음만은 아니었을 터이다. 단순히 아들에게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을 대리시키려는 욕망의 응집체로서의 한 소시민이 생을 마감한 것이 아니다. 이성과 합리성이 최고도로 발달돼 만들어진 자본주의의 굴레 속에서 그에 부합하지 못하는 구시대적 가치와 동시에 그 속에서 성공하고자 하는 양가적 욕망을 가지는 한 개인이 어떻게 파괴되는지에 주목해야할 것이다. 그것이 그의 죽음에서 슬픔보다는 쓸쓸함이 느껴지는 이유다.

 





그는 지나칠 정도로 가부장적이지만, 다른 의미로 가부장으로서의 모든 책무를 지는 데 집착한다. “어떻게 해야 내가 그 애에게 뭔가 남겨 주면서 나를 더 이상 혐오하지 않도록 할 수 있을까요.”라는 그의 말에서 아들에 대한 비뚤어진 사랑이 엿보인다. 그러나 왜곡된 사랑은 비단 그의 성격적 결함 때문만은 아니다. 평생을 죽도록 일만 하고, 그러면 자식들이 훌륭한 사람이 되리라 믿으며 견뎌왔는데, 하나는 바람둥이 하나는 백수가 되어 있었다. 미치지 않는 게 더 이상하지 않는가.







결국 그는 죽음으로써 고민을 마쳤지만, 남겨진 우리에게는 그가 왜 극단적 선택을 했는지 고민해야 하는 과제가 주어졌다. 우선 시대적 배경을 살펴봐야 한다. 이 작품이 창작된 시기는 20세기 중반으로, 대공황 이후 수정자본주의가 지배적인 때였다. 하지만 작품 속에서 그려지는 갈등과 인물들은 신자유주의 시대의 특징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어쩌면 조지 오웰의 <1984>나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가 미래 사회를 예측한 것과 같이 20~30년 이후의 경제 환경의 변환을 예측했다고 볼 수도 있겠다. 다만 대공황 이전 자유방임주의에 의한 자본주의를 한 번 경험한 터라 보다 현실적인 묘사가 가능했던 것 같다.







당시 ‘아메리칸 드림’이라 불렸던 자본주의의 기치는 모든 이들에게 ‘열심히 일하면 성공할 수 있다’라는 우상을 심어주었다. 윌리 역시 성실히 일하면 성공할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래서 아들에게도 ‘노력’하라고 했다. 그러나 세상은 믿음만으로 돌파하기엔 너무도 거대했다. 물론 그가 세일즈맨으로서 판매능력은 좀 모자랐을지 모른다. 그러나 회사와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게으름 없이 모든 걸 바친 대가는 가혹했다. 결국 자신이 정해놓은 사회적, 개인적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면서 자기혐오적인 행태를 보이기도 한다. 마지막까지 자식(비프)에게 성공 지향적 태도를 강요하는 모습을 유지하는 것도 어쩌면 삶을 유지하고자 했던 최후의 발악이었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되돌아보면 그의 삶에 자신은 없었다. 오로지 아들의 대한 과대망상이 생의 원동력이었다. 그런 그에게 가정에 더 이상 돈을 가져다줄 수 없는 상황은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자신의 효용가치가 없어졌다고 판단한 것이다. 누구도 그에게 돈을 벌어오라고 강요하지 않았지만, 윌리는 스스로 자신의 가치는 돈을 벌어오는 데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점은 그의 모습에서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가 보인다는 것이다. 인간의 본성이 변하지 않은 것일까. 아니, 그보다는 현 사회가 여전히 1세기 전의 사회구조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자본주의는 ‘이성’으로 태동했지만 끊임없이 ‘우상’을 배포했다. 그것은 변용되어 현재 청춘부터 노년까지 숭배해야 하는 ‘일하고, 노력하고, 성공하라’라는 슬로건이 되었다. 남겨진 것은 평생 할부금을 갚아나가야 하는 굴레뿐이다. 모든 것에 이자를 붙이는 자본주의는 결국 가난에까지 이자를 붙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세일즈맨의 죽음은 가장 자본주의적인 자의 죽음이라는 데는 모두가 동의하는 바이다. 자본주의적 요소를 가장 완벽하게 흡수한 인물의 몰락을 보여줌으로써 자본주의가 배태하는 자기 파괴의 모순이 까발려진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스스로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구성원들이 주위 모든 이를 경쟁의 대상으로 돌리게 한다. 자기보다 낮은 사람을 보고 위안을 얻고, 높은 사람에게는 어떻게든 붙어 이득을 취하려 한다. 배고픈 건 참아도 배 아픈 건 못 참는다고, 이웃 찰리와 그의 아들이 성공한 것을 보자 더욱 자신의 아들을 닦달하는 윌리의 모습에서 자본주의의 교묘한 특성이 여실히 나타난다. 이렇게 자본주의는 유지된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무서움은 단순히 경쟁과 갈등을 조장하고, 부패를 유발하며, 환상을 심어주는 데 국한되지 않는다. 문제는 금전적 목표 이외의 가치를 생각하지 못하게 하는 데 있다. 그럼으로써 사회 성원들은 현 상태를, 그것이 평등하든 불평등하든,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즉 자신을 소외시키는 체제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전도된 행태의 개인들을 끊임없이 양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윌리의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은 아님을 시사한다. 여기서 주목해야할 인물이 비프 로먼이다. 그는 부모에게 좋은 모습만을 보여주고 싶어 했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는 성과를 내야 하는 압박에 시달렸다. 사장이 되어야 한다는 암묵적 강요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타인의 욕망에 불과한 것을 깨달았다. 마지막에는 자기 역량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아버지에게도 자신 그 자체를 보여주고 인정받고자 한다. 비록 아버지는 당신의 최후까지 아들을 위해, 아니 자신의 믿음을 위해 목숨을 바쳤지만, 그는 떠났다. 그 이후의 행적은 나오지 않는다. 혹시 작가 아서 밀러는 그의 미래에 여백을 남겨둠으로써 당시 사회 구조 내에서 패배했지만,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떠나는 ‘비프’에게 기대를 걸었던 것은 아닐까. 남겨진 여백에 새로운 그림을 그려줄까 하고.

 





작품이 나온 지 70년이 다 돼간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사랑받고, 위대한 희곡으로 추앙받는 것은 앞서 말했듯 당시의 문제의식이 지금도 현존하기 때문이다. 또 윌리 로먼의 모습이 미국인이라 이질적으로 보이면서도 어디선가 대면한 기시감이 느껴지는 것은 우리네 부모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리라. ‘공동체는 탁월한 개인보다 언제나 지혜롭다’라고 한다. 반대로 공동체는 타락한 개인들의 합보다 무한히 악해질 수 있기도 하다. 따라서 우리는 주변 이들에게는 가해자가 되고, 구조의 피해자가 되어 처벌도 위로도 받지 못하는 개인이 더 이상 탄생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윌리 로먼을 애도하며.


 
최일우 2018-11-05 추천(0)
[자연과기술부문 우수] 멋진 신세계
법학과 1 안*지





이 책의 저자인 올더스 헉슬리는 영국의 비평가이자 소설가이자 시인이었다. 그는 저명한 과학자 가문과 문학가 가문 사이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해당 분야의 지식을 접할 수 있었다. 또한, 그가 대학교 때 의대에 진학했다가 눈이 나쁘다는 이유로 영문학과로 전과한 것, 신문 언론계에서 문예비평을 담당한 것 모두 그에게는 큰 도움이 되었다. 이런 것들이 합쳐져서 후에 헉슬리 자신만의 문학 세계관을 심화시킬 수 있었다. 그는 특히 현대 문명의 발달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에서 접근했는데 󰡔멋진 신세계󰡕에는 그런 그의 생각이 잘 담겨져 있다.







멋진 신세계는 크게 5부분으로 나뉜다. 문명국이 운영되는 방식을 설명한 부분이 그 첫 번째이다. 문명국에서는 ‘공유·안정·동일’을 중요시 여기기 때문에 인간을 인위적으로 병 속에서 조작하고 ‘보카노프스키법’을 통해 동일한 얼굴을 가진 인간을 계속해서 제조한다. 계급에 차등을 두어서 그에 따라 해야할 일을 부과하는 방식으로 국가가 운영된다. 이외에도 문명국에서는 다양한 기술과 물질을 이용해 인간을 통제하려고 한다. ‘불안’이라는 감정을 잊고 항상 쾌락만을 추구하기 위해 소마를 이용하고 수면식 교육법, 조건반사훈련을 통해 지배자들의 생각을 무조건적으로 추종하게 만든다.





두 번째 부분에서는 이런 문명국에 적응하지 못하는 ‘버나드’와 ‘헬름홀츠’라는 인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주인공 버나드가 문명국과는 대조적인 야만인보호구역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으로 다음 부분이 시작된다. 종교와 예술이 말살된 문명국과 달리 이것을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야만인보호구역에서 주인공은 ‘존’이라는 인물을 만난다. 이에 버나드는 존이 자신을 전출시키려는 소장의 아들임을 깨닫고 권력과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위해 문명국으로 데려온다. 존은 쾌락과 감각만을 추구하는 문명국의 실태에 환멸을 느끼게 되고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해서 폭동을 일으킨 죄로 체포되기 된다. 버나드와 헬름홀츠는 외딴 섬으로 전출을 당하고 존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등대에서 숨어지낸다. 하지만 문명국 사람들이 보내는 지독한 관심에 고통받고 이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으로 인해 결국 존은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된다.







󰡔멋진 신세계󰡕는 머지않은 미래에 과학기술로 인해서 우리 사회가 어떻게 변화해갈지 예측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현재 사회적으로 유전자조작 연구, 줄기세포 연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고 이에 대한 지속적인 실험이 행해지고 있는 상황이다. 따라서 연구가 성공하여 인간 복제와 같은 생명과학기술이 발달한다면 책에서 나온 유토피아 세계가 언제 현실화될지 모른다. 또한, 고도로 발전하고 있는 문명사회에서 우리가 과학기술의 양면성을 깨닫고 이에 대한 경각심을 갖게 해주었다는 점에서도 이 책은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과학기술의 양면성 외에도 󰡔멋진 신세계󰡕에서는 ‘인간불평등’이라는 주제에 대해서도 논의해볼 수 있다. 이 책에서는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계급이 있고 상층계급에게 받는 하대를 당연시 여긴다. 이러한 차별은 인간을 조작할 수 있음으로 인해 발생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인위적으로 인간을 제조할 수 있게 만든 원천인 과학기술이 인간불평등을 초래했다고 볼 수 있다. 책의 등장인물 중 한 명인 무스타파 총통은 “나는 이곳의 법을 제정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 법을 어길 수도 있는 위치야. (p.277)”라고 말한다. 기술을 이용해 선천적으로 상층계급이 된 사람들이 법을 이용해 하층계급의 사람들과 격차를 만들어나간다.





이러한 악순환이 반복되면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 및 기본적인 권리는 특정 사람들만이 향유하게 될 것이다. 󰡔멋진 신세계󰡕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진보는 멋있는 것이니까요. (p.126)” 그러나 이 시점에서 정말로 진보가 멋있기만 한 것인지 돌아봐야 할 필요성이 있다.







“나는 그냥 나대로 있고 싶습니다. 울적한 나대로가 좋습니다. 아무리 즐거울지라도 타인이 되고 싶진 않습니다. (p.111)” 이 문장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은 문구였다. 우리는 항상 행복이라는 최종적인 목표를 가지고 살아간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우리는 최종적으로 행복하기 위한 선택을 한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행복이 개인의 자아를 위한 것으로 생각되지 않는다. 이것은 항상 전체를 위한 것으로 “바로 그것이 행복과 미덕의 비결이야-자신이 해야 하는 일을 좋아한다는 것. 자신들의 피할 수 없는 사회적 숙명을 좋아하도록 만드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해. (p.24)” 행복은 지배계급이 하위 계층을 쉽게 복종할 수 있도록 해주는 도구 역할을 할뿐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보아야 한다. 21세기 우리가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수준에 맞는 기술이 발달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스로에게 ‘지금 행복합니까?’라고 물어보았을 때 잠시 망설이게 되는 자신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행복이라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정의 내리지 못할뿐더러 고도화된 사회 속으로 진입할수록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가는 것이 현대인들의 삶이기 때문이다. 헉슬리가 표현한 소마를 이용해 정체성과 자신이 처한 상황을 잊어버린 사람들과 불안으로 인해 정체성을 잠식당한 현대인의 모습이 겹쳐보인다. 두 상황 중 어느 쪽이 더 행복하다고는 결론 내릴 수 없다. 그저 과학기술과 행복 사이의 관계, 정체성과 행복 사이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으로 󰡔멋진 신세계󰡕는 그 임무를 잘 수행했다고 볼 수 있다.







󰡔멋진 신세계󰡕는 책 초반 신세계의 가치관을 설명하면서 문명국에서 일어나는 상황과 버나드가 동료들에게 괴롭힘을 받는 상황, 레니나와 페니의 대화를 교차해서 서술하고 있다. 이러한 작가의 서술 방식이 버나드의 혼란스러운 가치관을 신세계가 추구하는 가치관과 대조시켜 더욱더 부각시킬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자칫 지루하게 흘러갈 수 있었던 과학, 종교, 문화의 가치에 대한 내용을 등장인물들의 대화 속에 잘 녹여내어 표현했다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소설에 형식으로 과학기술의 발달에 따른 문제점을 드러내었기 때문에 독자들이 인물들의 감정에 이입해서 해당 문제를 심도있게 고찰할 수 있었던 것 같다.







21세기 현재 우리는 살아가는데 있어서 과학기술과 밀접한 관계를 맺을 수 밖에 없다. 생활 곳곳에 과학과 관련된 물건들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미래사회에서는 과학기술이 인간 사회를 지배하는 사회가 될 수도 있다. 이러한 사회에서 과학기술을 거부하는 것은 시대를 역행하는 행동이라고 볼 수 있으나 무분별하게 사용하는 것도 올바른 과학기술 사용법이라고 볼 수 없다. 따라서 다가올 미래의 과학기술에 대한 비판적 고찰 필요성을 느끼고 문학, 종교 등의 철학적 가치에 대한 사고를 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멋진 신세계󰡕를 추천한다.






 
최일우 2018-11-05 추천(0)
[자연과기술부문 우수] 멋진 신세계
물리반도체과학부 3 김*현



-‘안 멋진 구닥다리세계’를 살고 있는 야만인들을 위한 지침서-

 





최근‘툴젠’의 특허분쟁으로 인한 떠들썩한 이슈가 있었다.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기술의 소유권에 대한 내용이었다. ‘유전자 가위’는 종이를 자르는 가위처럼, 특정 유전자를 제거하고 교체할 수 있는 혁신적인 기술이다. 이제 사람의 유전자를 원하는 대로 바꿀 수 있는 시대가 눈앞에 온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 사회는 이제 기술적으로‘멋진 신세계’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소설에서도 마찬가지로 생명공학의 발전으로 인해 인간의 유전자를 조작하고, 원하는 수만큼 복제할 수 있는 600년 후의 미래를 다룬다. 그러므로 이 책은 1932년에 발간되었지만, 그 내용이 기술의 격차가 줄어든 지금, 더 와 닿는다. 그렇지만 역설적으로 책에서 언급되고 있는 지금의 우리 삶에 대한 평가는 ‘과거 말살 운동’으로 없어진 잔재이고 야만적인 것에 불과하다. 이러한 대조를 통해 헉슬리는 현대의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고 있다. 인문학적 가치보다 물질적인 가치를 더 추구하고, 노력이나 끈기 같은 자신의 내적 가치를 발휘하기 보다는 원하는 모든 것을 쉽게 얻기만을 바라는 시대에 일침을 가하는 작품이다.





 

멋진 신세계에서는 개인 교통수단으로 헬기를 타고 다닐 만큼 매우 물질적으로 풍요롭다. 적절히 분배가 이루어져 굶어죽는 사람도 없고, 의료기술의 발달로 죽을 때까지도 병이나 노화로 고통 받지 않는다. 이런 객관적인 요소만 본다면 이곳에서의 삶은 매우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도 작품 내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상을 편안하고 즐겁게 살아가고 있다. 이렇듯 모두가 만족하면서 살아가는 와중에 우연히 불행할 기회가 생기더라도, 부작용도 없고 중독도 없는 ‘소마’라는 완전무결한 약물을 복용한다면 자신만의 신을 만날 수 있고 고난과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단 한 가지의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지만 않는다면, 항상 행복할 수 있다. 자신들이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사회 시스템에 맞게 설계되었으며, 자신의 자유의지가 활동할 수 있는 곳이라곤 실제 세계가 아닌‘소마’를 통한 환각의 공간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불행히도 지도층을 제외한 모든 대중들이 수면교육법을 통해 어려서부터 철저히 세뇌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감정을 느낀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600년 후의 미래라고 설명하지만 전체주의, 군국주의와 같이 사회 시스템을 위해서 개인이 희생이 당연시 되는 1932년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반영하는 세계관이 책의 전반부에 소개된다. 이후에는 각종 계층을 대표할 수 있는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게 된다. 이런 인물들은 결과적으로 작가를 대신하여 우리에게 암시를 전달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우선, 작중 여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레니나 크라운은‘베타’계급으로써 이런 사회에 잘 적응해서 살고 있지만 다른 주인공들과의 대화와 행동을 통해 신세계의 허구성을 부각시킨다. 그녀를 중심으로 진행된 일련의 사건은 독자에게 이‘문명 세계’의 모순점에 대한 의문을 수면 위로 꺼내어 준다.







어느 날 한밤중에 그녀는 우연히 눈을 뜬 일이 있었다. 그때 비로소 수면 중에도 그녀에게 출몰하는 속삭임을 깨달았던 것이다. “만인은 만인을 위해 일합니다. 그 누구라도 없어진다면 잘 살아갈 수 없습니다. 엡실론 계급조차도 유용한 것입니다.” …(중략)… .

그렇지만 그녀는 끝내 깨닫지 못하고 베타 계급으로 태어난 자신이 행복하다 여긴다. 즉, 수면 중 교육이 자신의 사고방식을 조작했을 것이란 생각을 끝내 하지 못한다. 그 까닭은 그녀가‘보기 드문 미인’이기 때문에 더 쉽게 적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는 반대로, 최고 계급인‘알파 플러스’계급이지만, 다른 알파들에 비해 왜소하게 성장된 탓에 사회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불평과 불만이 가득한 인물로 버나드 마르크스를 제시한다. 그는 레니나와는 반대로 예정된 것보다 신체조건이 열등하게 태어난 것에 불행을 느끼고, 그로 인한 우울함을 항상 다른 사람에게 표출했기 때문에 사회에서 배척당한다. 이런 이유로 인하여 결국 중심에서 한 발짝 떨어져 관찰할 수 있게 되어, 그가 멋진 신세계에 대해 의심해볼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이 곳에 잘 적응하고 싶어 한다.





 

버나드는 결국 자신도 사랑 등의 인간적인 이유가 아닌, 이 곳의 잘 적응한 일원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가치’로써 레니나를 원하게 된다. 계속해서 그녀의 환심을 사고 교제를 계속하려고 시도한다. 이 계획은 일부 특권층에게만 허용된 야만인 보호구역 관광 데이트를 신청함으로써 완벽히 성공하게 된다. 결국 이렇게 야만인 보호구역에 가게 됨으로써 마지막 인물로 존이 등장하게 된다. 그 또한 버나드처럼 신체적인 이유(흰 피부)로 인해 야만인들 사이에서 소외감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었다. 이런 이유로 신세계를 동경하여 이주하지만, 인간으로써의 가치가 상실된 세상에 절망하며 그가 그토록 찾던‘멋진 신세계’는 존재하지 않음을 증명하듯 결국 자살하고 만다.





 

이로써 독자들은 책의 인물과 일련의 사건들을 관조하면서‘멋진 신세계’란 제목이 역설적인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레니나를 보며 멋진 신세계가 사실은 유토피아가 아니고 조작된 인공적인 세계일 것이라는 합리적인 의심을 가지게 된다. 버나드와 왓슨을 보며 이를 확신하게 된다. 끝으로 멋진 신세계를 찾아 온존의 자살이라는 충격적인 전개를 통해 종지부를 찍는다. 즉, 작가는 인물들을 통해서 멋진 신세계란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가 마음속으로 넌지시 바라는 꿈과 같은 미래는‘소마’와 같은 허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현실을 살고 있는 우리의 삶에서 중요한 것은 자신의 자유의지, 인간성을 실현하는 것이다. 행복은 단지 물질적인 것과 쾌락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또한 행복을 추구하는 방법은 불행으로부터의 도피가 아닌 이를 타개할 노력과 희생이다. 환상에 불과한 즐거운‘문명세계’에 절망하여 존이 결국 자살을 택했고, 버나드와 왓슨이 자신의 자율적인 의지로 행복하기 위해 직접 총통과 대면하여‘아이슬란드’로 보내달라고 했듯이 노력과 혜택을 포기하는 희생도 필요하다.

 





신세계가 아닌‘구닥다리 세계’에 사는 우리 또한 마찬가지이다. ‘불행’하게도 우리에겐 아직도 노력, 희생 같은 내적 가치가 존중받고 살아있으며, ‘문명세계’와는 다르게 이곳에서는 자신의 자유의지로 얼마든지 더 나아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태어난 가정환경을‘금수저, 흙수저’라고 이름 붙이며 단지 그 이유만으로 불행하다고 자조하는 사람이 많다. 게다가 남이 노력해서 얻은 성공을 단지 운이 좋았다고 치부해버리고 질투하기도 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에게 헉슬리는 불행이란 발전의 기회라는 사실을 깨우쳐준다. 만족할 수 없어야 사람들은 비로소 노력한다. 괴로운 감정이지만 만약 없다면 앞으로도 결코 본인 스스로 발전하고 성장하지 못할 것 이다. 현 시대의 2030세대들에게‘헉슬리’가 책을 통해 전하고 싶은 말 또한 그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최일우 2018-11-05 추천(0)
[자연과기술부문 우수] 열린 사회와 그 적들 1, 2
사회학과 4 김*일

 




유토피아를 원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그것이 개인적이든 사회적이든, 각자가 생각하는 유토피아는 모두 다르다. 더욱이 단어에 이미 ‘없는 장소’라는 의미가 포함돼 있는 것으로 보아 이뤄질 수 없는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

오스트리아 태생 철학자 칼 포퍼는 이러한 유토피아적 역사관을 비타협적 급진주의이자, 아름다움만을 추구하는 탐미주의로 보았다. 아쉽게도 ‘아름다운 미래를 위해 노력하자’라는 명제로 대변할 수 있는 1차원적 논의가 아니다. 문제는 급진주의와 탐미주의의 기형적 만남으로 인류가 나아가는 목적이 언제나 미래 어딘가에 존재하게 되면서 발생한다. 목적을 이루는 데 부합하지 않는 과정상의 행위는 모든 의미를 상실한다. 이렇게 되면 역사는 인간이 꾸려가는 게 아니라, 이상(理想)이 끌고 가는 형태가 된다. 때문에 이같은 무비판적 사고의 맹점은 우리 모두 이상을 꿈꾸지만 완벽한 이상적 청사진을 만들어낼 수 없다는 데 있다.





 

그가 이에 반대급부로 제시하는 사회공학론은 ‘비판적 합리주의’라 불리기도 한다. 인식과 실천에서 경험보다는 이성의 역할을 강조하는 합리주의의 전통에 서면서도 독단적 이성이 아닌 비판적 이성을 주장한다. 중세가 끝나갈 무렵 나타난 계몽주의 이후 지배적이었던 합리주의는 몸집이 커지면서 극단에 치우쳐 그 자체로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관습과 전통의 자리를 대신한 이성은 모든 ‘비이성’을 억압하고 배척했다. 이성 자체가 이미 ‘사회적 신’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누구도 그 권위에 도전하기 힘들었다. 때문에 그는 인간의 이성을 믿었지만, 그 경직성과 폭력성 또한 경계했다.







그의 이런 태도는 ‘인간의 이성은 본래적으로 절대적이지 않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우리의 모든 ‘앎’이란 잠정적이고 가설적인 성격을 지닌다. 즉 절대적 진리나 이론은 없으며, 그렇다고 주장하는 순간 하나의 ‘도그마’가 된다. 자연과학의 공식과 이론조차도 반증될 수 없으면 그 자체로 과학이 아닌데, 그보다 짧은 주기로 반대의견을 견뎌내야 하는 사회과학 이론이 더 이상의 반론을 수용하지 않는다는 전제로 대중에게 주입된다면 그 자체로 정당성을 얻을 수 없다. 때문에 일방적이고 불가역적인 주장을 하는 이들은 데마고그, 즉 독재자 혹은 선동가이다. 이런 관점에서 플라톤의 철인정치는 용인될 수 없었다. 칼 포퍼에게 플라톤은 중우정치를 혐오하며, 철학자인 자신이 국가를 통치하겠다는 오만의 피해자에 지나지 않았다.







한편 1차 대전 말기부터 러시아, 독일, 오스트리아 등을 휩쓴 공산주의 혁명 및 이에 대항하는 파시즘의 등장으로 혼란했던 상황 속에서 성장한 그에게 양자는 결국 선동가에 의해 행해지는 전체주의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인식됐다. 그러한 이데올로기가 배태하는 비인간성에 환멸을 느끼고 자유주의자의 길로 들어선 그가 쓴 책이 <열린사회와 그 적들>이다.

 





이러한 전체주의는 그가 가장 배척했던 ‘역사주의’에 기원을 둔다. 그가 규정했던 역사주의는 사학자들의 연구 주제와는 다르며, ‘인간의 힘으로 변경시킬 수 있는 차원을 넘어서는 어떤 법칙이 존재하며, 인간은 그에 의해 설계되는 운명과 필연의 그물 속에 존재하게 된다’라는 명제로 대변된다. 또한 역사주의는 미래를 예언하는 것을 사회과학의 목적으로 삼는다. 때문에 역사가 원시 공산제에서 최종적으로 공산주의에 도달한다고 본 마르크스의 진보주의 역사관 역시 역사주의의 한 갈래에 지나지 않게 된다. 당연해보이지만, 이 경우 변화하는 사회에서 개인의 힘은 사라지게 된다. 일부에 의해 “마르크스는 개인을 죽임으로써 비로소 자신의 혁명을 완성했다.”라고 평가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종교의 영역에서 삐져나와 우리 사회에 침투해 있는 이러한 애니미즘적 사고는 개인의 역동성을 부정하고 인간을 역사의 피동자로 전락시킨다. 이런 맥락에서 파시즘은 선택된 ‘인종’을 내세우는 자연주의적 역사주의이며, 맑시즘은 선택된 ‘계급’을 내세우는 경제적 역사주의로, 결국 선민사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렇게 역사주의는 존재하지도 않는 어떤 필연적 법칙이나 운명의 틀을 인간에게 뒤집어씌움으로써 열린사회가 추구하는 인간의 존엄성과 이성을 침식시켜왔다.





 

칼 포퍼는 역사의 방향은 운명에 맡겨지지 않는다고 보았다. 개개인의 선택과 결단, 그리고 상호비판에 기초한 보다 자유롭고 인간적인 사회가 역사의 과정이라 믿은 것이다. 지연된 행복이 진정한 행복이라 할 수 없는 것처럼, 지연된 판단도 올바른 판단이라 할 수 없다. 미래 ‘의존’적인 세계관이란 서두에 언급했던 유토피아적 사고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반면 점진적 사회공학이라 불리는 그의 사회개혁관은 독단에 대한 호소가 아니라 비판적 시험과 논의에 의해서 오류를 개선해야 함을 주장한다. 그리고 그럴 때만이 개개인은 역사의 능동적 창조자로서 등장할 수 있다. 그러나 언제나 부분적인 수정만을 시도해야 한다고 고집하지 않는다. 사회가 변화함에 따라 그 완급과 강도의 조절은 언제든 이뤄질 수 있으며, 그 방점은 ‘점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변화’에 있다. 그 변화의 주체는 물론 인간이어야 한다. 이로써 진리탐구와 역사변동의 주체로서 인간은 ‘열린사회’에 대한 주인정신과 함께 책임감을 안게 됐다.







본래 ‘열렸다’라는 개념은 심리학에서 개인의 심성이나 성격적 특성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하던 것이다. 권위주의적이고, 비타협적이고, 배타적이고, 독단적인성격을 의미하는 ‘닫혔다’에 대립되어 평등주의적이고, 타협적이며, 관용적이고 비판을 수용하는 특성을 일컫는다. ‘열렸다’라는 의미는 ‘진정한 완전이란 완전의 상태에 머물지 않는 것’이라는 기치에 근거하는 것이다. 이 양 극단은 사실 고대부터 상호 대립과 갈등의 관계를 유지해왔다. 즉 ‘열린사회’라는 개념은 개인의 심리적 차원에서의 논의를 사회문화적 차원으로 확대시켜 사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앞서 말한 ‘진리의 독점 거부’와 개인의 ‘자유와 권리의 보장’이다. 하지만 무조건적인 자유는 아니었다. 자유의 극단이라 볼 수 있는 자유방임의 사회 또한 그가 가장 경계했던 대상 중 하나였다. 자유방임은 자유의 역설로 인해 유지되기 힘들기 때문이다. 제한되지 않는 자유는 폭력으로 변질된다. 우리는 그것을 그 자유방임이 고도화된 산물인 신자유주의로부터 체험하고 있다. 신자유주의는 시장 논리에 부합하지 않는 모든 것을 도태시키지만, 그 방식은 폭력적이며 피해는 대개 아래로부터 시작한다. 이러한 자연상태를 관리할 수 있는 유일한 주체는 ‘국가’이며, 때문에 그는 치안·안보의 영역을 넘어 경제적 영역에서의 국가보호주의를 주장했다. 따라서 그가 지향했던 것은 자유방임과 계획주의의 역설을 모두 피하고자 하는 사회였다. 현대의 이론 체계에서 이런 관점은 비겁하거나 양비론의 입장을 띠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힘드나, 인류의 자유와 그 자유를 제어할 장치를 동시에 고민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할 수 있겠다.

 





한때 마르크스의 스승이었던 포이에르바하는 “종교에서는 거룩한 것만이 진리이지만, 철학에서는 진리인 것만이 거룩하다.”라는 말을 남겼다. 칼 포퍼에게 중요한 것은 거룩한 것이 아닌,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상은 추상적이고, 지금 당장 우리가 당면한 과제가 아니다. 하지만 ‘악(惡)’은 오늘이며 지금이다. 가난과 실업, 전쟁과 질병, 강자의 억압에 의해 비참한 상태에 빠진 수많은 사람들이 악을 경험해 왔으며, 일상은 아래로부터 무너졌다. 그런데도 이상적 세계에 빠져 현실을 접어두자고 하는 것은 사상적 독재다. 잡히지도 않는 집단적 대의를 추구하는 것보다 그 과정에서 죽어나가는 이들을 지키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모든 것은 진보의 결과이지만, 진보된 모든 것이 올바른 결과는 아니다. 언젠가 특정한 미래가 오겠지만, 우리는 또 받아들여야겠지만, 보다 올바른 결과를 만들기 위해 우리는 오늘 노력해야 할 것이다. 머릿속에 그리는 미래는 머리에 머물 뿐이다. 우리는 당장이라도 펜을 들어 그 밑그림을 그리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열린사회는 어떻게 그려질 것인가, 그것은 우리 손에 달렸다.

최일우 2018-11-05 추천(0)
[자연과기술부문 최우수] 멋진 신세계
철학과 3 이*준



 


우리는 ‘신세계(新世界)’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다. 여기서 신(新)은 새롭거나 처음으로 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이다. 그래서 보통 이 단어는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세상이나 지금의 고통이 없는 세상을 꿈꿀 때 사용된다. 하지만 나는 이 책에서 신은 신하나 하인을 뜻하는 신(臣)세계라고 말하고 싶다.

 





책에서 보여주고 있는 세계는 한 마디로 개인의 삶에 주인이 없는 세계이다. 이 세계의인간은 탄생부터 죽음까지 계획되고 통제되고 분리된다. 당연히 평등에 대한 개념 대신 계급이 자리잡고 있고 개인이라는 개념 대신 집단이라는 개념이 우선되는 그런 세상이다. 그 곳에서 총 3명의 주인공이 나오는데 신세계 문명의 실수로 만들어진 열등한 돌연변이와 천재적 지능으로 생긴 우월한 돌연변이, 그리고 비문명의 세계에서 태어난 돌연변이가 그들이다. 이들을 돌연변이라고 지칭한 건 이 3명만이 자신의 삶에서 주체적인 선택을 하고 자신이 단독의 개인임을 자각했기 때문이다. 책은 3명의 인물들의 행동을 통해 신세계가 가진 인간의 노예화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첫 번째는 감정의 노예화이다. 신세계엔 소마라는 마약이 있다. 3명의 주인공들은 이 소마 복용을 거부하는데 소마의 정체는 신세계의 총통과 만나는 장면에서 자세하게 나온다.





 

“분노를 진정시키고 적과 화해시키고, 인내하고 수난을 참도록 하는 소마가 있다 이 말이야. 옛날에는 대단히 어려운 노력을 거치고 오랜 수양을 쌓아야 겨우 도달되는 미덕이었지. 그러나 이젠 반 그램짜리 두세 알만 삼키면 그러한 수양의 경지에 도달한다는 말일세.”(364.p)





 

이러한 마법의 약을 통해 세계는 표면적으로는 갈등을 겪지 않게 되지만 실상은 갈등의 요소인 인간의 악한 감정을 제거한 결과이다. 그리고 일반 마약들처럼 소마라는 약도 중독현상과 과다복용시 사망할 수 있는 위험성도 지니고 있는데도 그것을 신세계에선 당연하고 필수적인 것으로 인식한다. 이런 세계에서 3명의 인물들을 제외하고는 우울, 불안, 슬픔, 증오, 분노 등을 거의 느끼지 못하고 이런 감정이 생길 때마다 소마를 복용해 감정을 제거해버린다.

 





두 번째로, 노예화된 것은 성(性)이다. 현실에서 모든 인간은 성적 자기결정권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서로 합의하에 결혼도 할 수 있고 원한다면 출산이라는 결정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성이 통제된 세계에선 ‘만인을 위한 만인’이라는 모토 아래 여러 남녀들이 어렸을 적부터 조건반사라는 암시를 통해 모두하고 성관계를 나누도록 암시되고 교육된다.

 





“임신하지 않는 여자와 아무리 많은 쾌락의 외도를 즐겨도 자네는 자네 아들의 애인에 의해 눈알을 빼앗길 염려는 없을 걸세.”(361.p)







여성은 의무적으로 피임약을 복용해서 임신을 하지 않게 되고 남자든 여자든 어느 한 명하고만 성관계를 가지는 것은 규율에 어긋나게 된다. 이 규율은 인간에게 성적인 자유를 주는 듯 보이지만, 결국 개인의 성적 자기 결정권을 빼앗는다. 그 이유는 우리가 아는 결혼이라는 일대일 관계, 출산이라는 행위, 그리고 성적인 행위를 거부하는 것도 사회적으로 비정상적이라고 인식되기 때문이다. 즉, 모든 사람과 성관계를 할 수는 것이 아니라 그래야만 하고 그렇지 않은 것들은 허용되지 않는 것이다.

 





세 번째로 노예화 된 것은 노동이다. 앞서 신세계에선 평등이라는 개념 대신 계급이 존재한다고 말했는데 노동도 계급에 따라 나뉘고 철저히 국가에 의해 강제된다. 국가는 태아들에게 앞으로 하게 될 노동의 종류에 맞춰 성향을 억지로 부여한다.

 





“더운 터널과 추운 터널이 교대로 설치되어 있었다. 강한 X레이의 형태로 차가운 온도가 불쾌감을 자아내고 있었다. 그래서 병으로부터 출산할 무렵에 가서는 태아가 추위에 대한 공포심을 갖게 된다. 이 태아들은 열대지방에 이주하여 광부나 인조견 직조공이나 철강공이 될 예정이었다.”(27.p)

 





더욱 소름 끼치는 사실은 이러한 성향뿐만 아니라 노동을 통한 자아실현까지도 통제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좋아한다는 것, 모든 조건반사적 단련이 목표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야. 자신들의 피할 수 없는 사회적 숙명을 좋아하도록 만드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해.”(28.p)

 





이 세상에선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일들을 억지로 하는 것도 모자라 그 일들을 평생 좋아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평생 해야 할 노동이 선택되고 그것을 좋아할 지 싫어할 지조차 선택할 수 없다. 이것은 마치 인간이 기계의 한 부품으로 전락한 것과 같고 누구든 절대 노동을 통한 자아실현은 불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네 번째로 신세계가 인간들에게 박탈한 것은 지적 탐구이다. 그들은 학문을 억제하기 위해 신세계가 구축되기 전 역사, 문학, 예술 등을 없앴고 과학은 발전의 영역을 제한하여 단지 인구를 어떻게 잘 유지해 나갈 수 있는 지에 대해서만 범위를 한정했다. 종교도 마찬가지로 모든 세계 종교를 제거했고 그 자리에 신세계의 창시자인 포드라는 사람을 우상화해서 위치시켰다. 신세계의 총통 중 한 사람은 그것을 신과의 독립이라고 말하며 인간이 신 없이 살아갈 수 있게 만들었다고 자랑스러워한다.







하지만 이런 조치들은 문명의 획일화를 불러왔다. 모두가 같은 공부를 하고, 모두가 같은 사람만을 숭배하면서 사람들은 같은 지식 수준, 같은 취향, 같은 가치관 속에 매몰되어 살아간다. 그래서 주요 인물 중 비문명의 세계에서 태어난 돌연변이를 보고 신세계의 각계각층 사람들은 과도하게 관심을 가지고 그의 주체적인 행동들을 보면서 놀라워한다. 그만큼 그들에겐 각자의 개성이 없고 창의성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신세계가 노예화 시킨 것은 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그것은 행복이다. 위에 언급한 소마라는 마약, 조건반사를 통한 감정 통제 등을 이용해 신세계 국민들은 모두 자신들이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이 진짜 행복일까? 국가는 개개인의 행복을 하나의 조건화 된 틀로 만들고 그것들만 끝없이 만족시켜주면서 국민들이 행복하다는 환상에 빠져 살도록 만드는 것이다. 왜냐하면 개개인의 행복은 국가에겐 귀찮은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국가는 안정과 균형만 추구하는 데 개개인의 행복이 다르고 각자 다른 것들을 추구한다면 국가는 매우 귀찮고 관리에 어려움을 느낄 것이다. 그런데 과연 집단의 편리성만으로 개인의 행복이 무시될 수 있을까? 그리고 정형화된 행복의 틀 안에서 느끼는 행복이 행복일까? 신세계 속 행복은 분명 개인이 아닌 집단만의 행복일 것이다. 아마 그 행복은 수학적으로 계산된 쾌락의 총량이지 높은 질의 행복, 다양한 종류의 행복은 아닐 것이다.

 





이 밖에도 책에서 개인들은 노령화에 대한 자유, 고독할 수 있는 권리, 진리 탐구 등 많은 것들을 빼앗긴다. 물론 이런 자유를 빼앗긴 대가로 받는 달콤한 독약들(성적 문란함, 환상체험, 단순한 삶의 패턴 등)도 주어진다. 그래서 누군가는 현실 속 개인의 삶이 가지는 복잡함과 어려움으로 인해 이런 사회가 과연 나쁜 것인가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기억해야 된다. 우리가 개인으로서 인정받지 못하는 순간, 나의 삶은 나의 것이 아니다. 그 순간, 나는 삶의 주인이 아니라 하인과 노예 같은 객체로 전락한다. 삶이 행복하거나 불행한 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가 내 삶의 주체인 것인가가 중요하다. 그래서 나는 책을 읽다가 가장 인상 깊었던 주인공의 대사로 리뷰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신세계의 총통이 묻는다. “그러니까 자네는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하고 있군그래. 그렇다면 말할 것도 없이 나이를 먹어 추해지는 권리, 매독과 암에 걸릴 권리, 먹을 것이 떨어지는 권리, 이가 들끓을 권리,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서 끊임없이 불안에 떨 권리, 장티푸스에 걸릴 권리, 온갖 표현할 수 없는 고민에 시달릴 권리도 요구하겠지?”

 





개인으로서, 삶의 주인으로서 주인공은 대답한다. “저는 그 모든 것을 요구합니다.”

최일우 2018-11-05 추천(0)
[경제와사회부문 우수] 보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
경제학과 4 김*민





<이성을 지배하는 경로 의존성>





키보드의 좌측 상단에는 'Q,W,E,R.,T,Y'라는 영문자판 6글자가 잇달아 놓여있다. 쿼티라고 불리는 본 자판 배열은 초기 타자기의 미흡한 기술을 보완하기 위해 타이핑의 속도를 늦추려던 전략적 배치였다. 기술의 발전 하에 자판배열을 효율적으로 변화시킬 기회는 충분했다. 그러나 사회가 이미 쿼티 배치에 너무나 익숙해져버린 탓에 새로운 키보드를 보급하는 것은 쉽지 않았고, 결국 쿼티 자판은 현재까지도 통용되고 있다. 경제학에서는 이와 같이 변화하는 것이 이익이 될 가능성이 다분하지만 ‘없는 것을 탄생시키는 것보다 있는 것을 변화시키기 어려운 현상’을 '경로의존성' 이라고 부른다. 관성을 유지하거나 저항해야하는 선택의 순간은 어떠한 인간도 피할 수 없다. ‘보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에서는 선택의 기로에 선 사람들을 향해 보수가 채택해온 전략을 명확히 짚어낸다.

 





<변화가 필요한 개인들이 선택하는 안정성>





다수의 사람들은 위험 회피적이며 항상성을 추구한다. 변화에 수반되는 과도기는 상당한 경제적, 심리적 비용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긁어 부스럼'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간다'는 속담처럼 ‘없는 것이 위험할 순 없지만 있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는 말은 실로 그럴듯하다. 안정을 유지하는 비용과 변화를 도모하는 비용의 간극이 그리 넓지 않다면 변화는 선호의 우선순위 밖에 있다. 하지만 가속을 거듭하는 세상에서 변화를 요구하는 개인과 집단은 언제나 존재한다. 더욱 명백히, 일반적으로 기회를 요구하는 쪽은 '다수'이고 현상을 유지하는 것은 '소수'이다. 따라서 소수를 제외한 대다수는 기회'를 창출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질서를 수정해야 한다.







비범하지 않은 '나' 하나의 개인은 안정적인 집단에 속해 보호받기를 원한다. 피라미드의 꼭대기를 선점하기보다도 안정적 울타리를 만드는 것을 우선하는 것은 본능이다. 균형을 유지하는 것은 삶을 영속하기 위한 불가항력의 욕구이므로 안전을 위협할 존재가 타고 오를 사다리를 걷어차는 것은 합리적인 선택이다. 그러나 종종 기존의 것보다 체제의 제약 및 전환을 요구하는 것이 마땅한 집단마저도 보수의 편에서 함께 해왔다. 상식에 의하면 보수는 소수로서 힘겨운 투쟁을 해야 마땅하나 일반적인 견해와는 달리 너무나 잘 싸워왔다. 이러한 의문은 인간의 생리 하에 어느 정도 해소된다. 인간의 최우선의 목표는 생존이다. 당장 배를 곯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은 생계에만 몰두시킨다.‘유한계급론’의 베블린의 분석처럼 생계에 힘써야 한다면 현상을 파고드는 데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삶을 유지하기 위해 이미 전력을 소비하고 있으므로 체제를 바꿀 여분의 체력이 부족하다. 과도기를 겪어낼 여건이 되지 못한다면 100%의 성공을 보장하지 못하는 귀찮고 복잡한 선택지를 고를 이유가 없다. 혹은 보수를 지지함으로써 사회 지배층과 함께 한다는 명예욕을 간접적으로 성취할 수도 있으며, 불가지론적 입장에 서서 와닿지 않는 정책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허무주의의 태도로 방조하기도 한다. 하지만 본 책은 이 같은 일반적인 이유를 언급하지 않는다. 3가지의 교묘하고도 영특한 전략이 보수를 승리로 이끌었음을 지적한다.





 

<보수의 병법서, 3가지 명제들>





해치운 선택에 대해서 그것을 선택한 이유를 되새기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하지 않은 선택을 곱씹는 것은 어려우며, 완성되지 않은 선택은 많은 경우 그 이유가 포장된다. 현상유지는 합리화가 쉬우므로 진보보다 장벽이 낮기 때문에 우리는 책에서 설명하는 보수의 3가지의 전략에 쉽게 이끌린다.

첫째, 변화의 시도는 결국 아무런 변화도 만들어내지 못할 것이라는 '무용명제'이다. 민주주의를 위한 유·무혈의 투쟁은 무용지물이며 결국 정치는 소수에 의해 굴러갈 뿐이라는 의심을 가져본 적이 있는가? 이러한 허무감에 젖어 눈앞의 과제를 방조하고 있다면 덫에 걸려든 것이다. 불변하는 세상의 상수에 도전하는 어리석은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보수의 영리한 머리싸움이다.







둘째, 개선을 꿈꾸며 추진한 변화가 의도와 달리 정 반대의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최저임금제는 결국 법의 빈틈 찾아내 오히려 총 임금은 저하시키고 경제를 악화시킬 것이라거나, 가격 상한을 두어 시장을 통제해도 암시장이 형성되어 가격은 되려 상승한다는 주장이 이에 해당한다. 보이지 않는 질서를 향한 개입은 오히려 역의 결과를 낳는다는 '역효과 명제’는 보수의 훌륭한 전략이다.

셋째, 목적은 좋을지 모르나 불확실한 결과에 과도한 리스크와 비용을 감당해야 한다는‘위험명제 이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자는 복지제도의 선한 의도는 좋다. 하지만 복지가 악용될 부작용이 분명히 존재한다. 게다가 능력에 따른 분배를 토대로 한 시장원리를 역행하는 것은 사회 근간을 흔들고 근로의욕 또한 저하시킬 것이다. 복지를 통한 형평의 실현은 오히려 잘 작동해온 경제와 자유까지 위협할 수 있다며 반기를 들어 올리는 것이 보수의 세 번째 병법이다.







즉, 보수는 세 번의 강력한 태클을 걸 수 있다. 진보의 시동 직전에 위험성을 언급하고, 변화 초기 및 축적기에 역효과를 우려하며, 변화의 시차사이에 무용지물임의 가능성을 되묻어서 토대를 깨뜨리는 두려움을 자극한다.







<보수와 진보는 선과 악의 판별이 아니다>





본 책은 보수와 진보의 편가르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이해관계의 총체인 사회에서 보수나 진보는 절대로 선악의 기준이 될 수 없다. 심지어 둘은 서로를 견제하고 경재하며 최선의 결과를 만들어가는 동반자이기도 하다. 다만, 개인은 반드시 진보와 보수에 대한 정의를 분명하게 밝힐 수 있어야 한다. 그렇기에 저자는‘전략’이 아닌 ‘내용’에 따라 입장을 행사하고 의견을 표하기를 바라는 의도를 담았다고 해석된다. 오도되지 않은 진짜배기의 진보나 보수가 될 판단 기준을 세우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현재의 시장 및 정책에 긍정적인 시각을 가진 개인은 사회 갈등의 원인을 개인으로부터 찾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보수의 편에서 자신의 이상향을 응원하는 것이 마땅하다. 반면에 현 시장 및 정책에 부정적 시각을 가지고 있는 개인은 사회 문제의 원인을 사회 구조에 기인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진보의 편에 서서 본인의 지향점을 쫓으면 된다.







가치관을 재고할 때 필수적인 두 가지의 전제가 있다. 변화는 당연히 경제·심리 등 각종 비용을 수반한다는 것, 무언가를 지키는 것은 지킬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가 세워준 보수의 3가지의 명제를 기준으로 스스로를 강하게 다그쳐볼 필요가 있다. 단지 형체가 불분명하고 결과가 보장되지 않는 '변화'에 동반하는 부작용, 역효과, 무용성의 두려움 때문에 현상유지를 선택하는 비겁한 보수는 진짜배기가 아니다. '현존하는 원리가 자신의 가치에 부합하기 때문에 견지하고 싶은 것' 인지 끝없이 되 물어야 한다. 보수는 관조하는‘방어’가 아니라 진보와 마찬가지로 적극적인‘공격’이어야 하므로 보수의 내용이 아닌 전략에 미혹되는 것은 스스로를 어리석게 만드는 것이다. 안정적으로 회사를 운영하는 기업가가 보수를 지지하는 것은 합리적이나 노동자가 보수에 편에 서는 것은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현대는 개인의 의견이 정책과 정부를 결정할 수 있는 시대이다. 개인의 노력을 탓하며 국가가 뻗는 손을 쳐내고 고통과 삶의 부담을 본인에게 전가하면서 스스로에게 가혹할 필요는 없다.





 

<보수의 지배방식으로부터 스며든 근본의 문제의식>





책은 보수의 전략에 따른 진보의 방어 설계도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노동자가 진보로 단결할 것을 촉구하지도 않는다, 저자는 독자 개개인이 가치를 정립하는데 미시적으로 침투할 수 있는 전략적 방식을 깨우치고 경계하기를 바라는 궁극적인 목표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또한 이는 삶에서 추구하는 본인의 가치는 무엇이며 그 가치가 온전히 자신의 것인지에 대해 고민해야한다는 문제의식으로도 확장할 수 있다.

어떤 사건과 상황에서든 틀을 유지하려는 것은 틀을 깨뜨리는 것만큼 적극적이어야 한다. 방임이 아닌 공격의 능동성을 가진 사람과 사회는 자유와 가치를 견지하는데 서툴다하여도 결코 실패하지는 않을 것이다.
최일우 2018-11-05 추천(0)
[경제와사회부문 우수] 감시와 처벌
경영학과 2 박*진





현대인들은 SNS에서 해쉬태그를 통해 자신과 관련된 문구를 태그하고,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을 검색할 수 있게 허용한다. 이는 자신을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행동으로 대중 또는 공중과의 호의적인 관계를 만들어가려는 것인데, 이와 같은 현상이 만연한 사회를 ‘자기 PR 사회’ 라고 일컬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가까운 일상에서부터 먼 것처럼 느껴지는 일들까지, 스스로를 얼마만큼 잘 ‘PR’하느냐가 현시대를 살아가는 데에 중요한 요소로 작용되고 있다. 이러한 현대인들의 모습은 책 <감시와 처벌>에서 등장하는‘순종적인 신체’와는 다소 거리가 있어 보인다. 그렇기에 책을 읽으면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로 등장하는 ‘순종적인 신체’를 잘 이해하기 위해 ‘현시대를 살아가는’ 필자의 입장에서 의문을 가지고 책을 읽어보았다.







실제로 필자는 푸코에 대한 공부를 꽤 했었는데, 이는 <감시와 처벌>을 읽어나가는 데 도움이 되는 한편, 의문을 가지게 되는 이유이기도 했다. 푸코는 통치성 연구 시절 능동적인 주체를 가리켜 ‘자기를 판매하는 사업가’로 지칭한다. 이는 푸코가 고수해오던 계보학 시기를 다룬 책 <감시와 처벌>의 ‘권력에 의해 생산, 규율된 순종적 신체’와는 다른 접근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푸코의 문제의식이 계보학 시기에서 통치성 연구시기로 넘어가면서 변화했다고 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를 ‘통치 이성’이라 표현한 것은, 어떻게 지배할 것인가의 문제를 어떻게 자신을 대할 것인가의 문제로 결합하는 근대 정치권력의 특성을 설명하기 위해 푸코가 사용한 개념으로, 그에 의하면 근대 통치 이성은 지배의 테크놀로지와 자기의 테크놀로지를 결합해 작용했다는 것이다. 즉, 권력이 신체를 지배하는 데에 신체의 주체가 자신의 주체성을 어떻게 형성할 것인지 고려하는 것을 이용한다는 것이다. 권력은 그 주체성이 피지배자의 삶에 작용하는 방식을 ‘멀리서’ 규정함으로써 주체를 간접적으로 지배한다. 바로 이러한 권력의 작용 방식 때문에 주체는 자기 자신의 기업가가 될 수 있었다.





경쟁사회에서 주체는 자기 자신을 PR하며 자신을 돋보이게 만들 수 있도록 하는 개인적 자유를 부여받지만, 권력에 의해 지배받고 있다는 사실에서는 벗어나지 못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기 자신을 PR할 때 자신의 가치를 최우선의 대상으로 고려하고 있는 것이 확실한가? 단지 권력의 지배 아래, 자신을 PR함으로써 능동적으로 행동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여전히 다른 의미의 ‘순종적인’ 신체가 아닐까? 즉, 권력의 눈에 들기 위해 자기 PR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렇다면 먼저, 현대인들이 자신을 어떻게 칭하고, 드러내는지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현시대 인들은 입시를 할 때부터 취업, 그리고 그 이후에 까지 자기 PR을 통해 자신을 보다 매력적이게 보이도록 한다. 그렇기에 대학 입시 자기소개서에서는 자신이 공부해온 방식이 특정 대학교의 대학생활에 얼마나 적합한지 드러내려 하고, 취업을 위한 자기소개서에서는 자신의 역량이 회사에 어떠한 이익을 가져 올 수 있는지를 극대화하여 표현하고자 한다. 이처럼 자기 PR은 자신의 장점을 파악하고, 이를 대외적으로 ‘잘’ 알리는 것이다.





그러려면 우선 자신을 잘 파악하고, 자신을 어떻게 묘사할 것인지가 중요한데, 여기서 한 가지 선택사항이 생긴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묘사할 것이냐, 아니면 목적에 맞는 이상적인 자신을 만들어 내어 묘사할 것이냐.’ 자기 PR의 목적은 엄격히 말하면, 자신의 주체성을 형성함으로써, 다른 공중들과의 호의적 관계를 통해 결국 자신의 이익을 창출하고자 하기 위함으로, 신체의 주체들은 자신을 이상적으로 만들어 내고자 하는 유혹에 쉽게 넘어간다. 즉 ‘가상의 나’를 이용해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려 하는 것이다. 이는 권력이 주체에게 직접적으로 작용한 것은 아니지만, 신체의 주체로 하여금 자신을 권력의 잣대에 맞게 변형하도록 만듦으로써 결국 신체의 주체는 권력의 지배하에 위치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신체가 계보학 시기의 권력의 감시 아래 규율화 되는 순종적인 신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가상으로 만들어진 자신을 판매하는 사업가 역시 ‘가상의 나’를 만든 순간, 권력의 잣대에 순종적으로 맞춰가는 것에 불과하다. 이는 ‘진정한 나’의 가치는 최우선으로 고려되지 않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보다 능동적인 신체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권력의 작용 방식이 변한 것일 뿐, 자신의 가치를 최우선으로 고려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계보학 시기의 ‘순종적인 신체’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가상의 나’를 PR하지 않다고 해서 순종적인 신체에서 완전히 분리되었다고 보는 것은 옳지 않다. 현시대 인들은 순종적인 신체의 특성과, 보다 능동적인 자기를 판매하는 사업가로서의 신체의 특성을 모두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진정한 자신의 가치를 최우선의 가치로 생각함에도 불구하고, 학교를 비롯한 교육제도에 의해 불가피하게 신체가 감시당하고, 규율화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제도를 벗어나는 것은 큰 위험부담을 안으므로, 순종적인 신체에서 분리되어 완벽하게 능동적인 신체가 되기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판매하는 사업가’라는 개념의 탄생과 변화한 권력의 작용 방식은 충분히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







경쟁사회에서 주체는 자기 자신을 PR하며 자신을 돋보이게 만들 수 있도록 하는 개인적 자유를 부여받는다고 했다. 그렇다면, ‘자유’의 의미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그리고 푸코가 말하는 자유란 ‘일하는 주체가 자신의 경제적인 삶을 주체화하는 것’ 일 것이다. 개인은 앞서 말했듯 자기 PR을 통해 궁극적으로 자신의 이익을 창출하려 하고, ‘자유’를 얻으려 하기 때문에 권력은 이를 이용한다. 자신을 책임지는 자율적인 주체로서의 개인을 통치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권력은 새로운 통치 방식을 도입하여야 했다. 즉, 통치 대상으로서의 개인의 정체성을 재구성하고, 이들이 자기 삶을 대하고 관리하는 방식에 새로운 원리를 도입한 것이었다. 개인에게 자신을 드러내게 하고, 자율적으로 자신의 삶을 만들어가고, 행동하도록 독려하지만, 결국 개인은 권력을 따르게 되어있는 원리가 작동하는 것이다.





즉, 개인은 자기 PR을 통해 이익을 창출하려고 하고, 이 과정에서 권력의 잣대에 맞춰 자유를 사용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자신을 판매하는 사업가’라는 개념의 탄생과 변화한 권력의 작동 방식은 ‘가능성’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권력의 작용방식의 변화가 자유를 이용하는 것에서 기인하는 것이라면, 현대인들에게 이러한 자유의 부여는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준다.







‘진정한 나’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가능성. 권력에 의해 획일화되어 지배받던 개인에 불과했던 순종적인 신체가 아니라 제각기 개성을 지닌 각자로서의 개인이 자신을 세상에 드러냄으로써 진정한 자기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권력이 자유를 이용하여 지식기반 경제에 속해있는 개인을 지배하려고 한다면, 개인 또한 자유를 이용하여 자신의 가치를 우선적으로 고려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질 수 있다. 그렇게 된다면 권력으로부터 조금은 벗어난 선택을 할 수 있는 주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자기 PR 시대의 개인들은 여전히 권력의 늪에서 ‘권력에 의해’ 자기 자신의 가치를 재생산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권력이 개인의 이익 창출의 열쇠를 쥐고 있기 때문에 이 열쇠를 가지려 하는 개인은 언뜻 보기에 능동적으로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여전히 순종적인 신체로서의 면모를 보인다. 그렇기에 ‘ 스스로의 가치를 최우선 대상으로 고려할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의 답은 개개인 스스로에게 달려있다. 필자는 <감시와 처벌>을 읽는 또 다른 독자가 ‘자기 PR 사회의 권력의 잣대에서 조금은 벗어나 진정한 나의 가치를 되짚어’볼 수 있기를 바라며 이 책을 다른 이들에게도 추천하고 싶다.
최일우 2018-11-05 추천(0)
[경제와사회부문 최우수] 공산당 선언
신문방송학과 4 원*진

 


 

맑스의 <공산당 선언>은 인간 해방을 외치는 단호한 격문이다. 그의 혁명적 사상은 이 책의 첫 문장에도 고스란히 녹아있다.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떠돌고 있다 –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맑스가 생을 마감한 뒤에도 이 붉은 유령은 죽지 않고 한 세기 넘게 황량한 대륙과 광대무변한 대양을 횡단했다. 한때 사회주의 국가 형태로 실체화됐던 유령은 오늘날 다시 육체를 잃고 역사의 뒤안길에서 배회 중이다. 현실을 사는 많은 이들은 20세기 말 공산주의권 붕괴를 근거로 공산주의를 실패한 이론이라 단정 내린다. 언뜻 보기엔 당연한 말 같지만 꼭 타당한 말은 아니다. 부의 총량이 늘고 가계의 살림살이가 나아졌다고 하나, <공산당 선언>에서 맑스가 지적한 자본주의의 문제는 양태만 바뀐 채 현존하고 있다. 진보는 인간의 잠재력을 신뢰하는 데서 출발한다는 에드워드 카의 말처럼, 우리는 스스로 믿음을 가져야 한다. 다름 아닌 우리가 자본주의의 멍울진 병폐를 개선할 수 있다는 믿음. 그 의지의 원천이 바로 공산당 선언에 온존히 담겨있다.

 





근대 자본주의는 인류가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폭발적인 생산력을 구현했다. 맑스 역시 자본주의의 가공할 만한 경제적 동력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과거에 그는 독일 관념철학의 거인인 헤겔을 연구하며 '현실 속에서 이념을 찾는다'는 본인만의 연구 방향을 확립했다. 맑스에게 주어진 현실은 자본주의였으며, 새로운 이념은 변증법적 유물론을 통해 발견될 것이었다. <공산당 선언> 도입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듯, 사적 유물론 시각에서 이제까지 사회의 모든 역사는 계급 투쟁의 역사이다. 자본주의도 예외는 아니다. 맑스는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을 인류 역사발전의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동인으로 지목했다. 그에 따르면 근본적으로 생산력은 팽창하는 속성을, 생산관계는 정체하는 속성을 갖고 있다. 생산력의 발전은 생산관계의 변화를 추동하는데, 이러한 역학이 임계점에 도달하면 생산관계는 종국적으로 생산력에 대해 질곡으로 작용하게 된다. 계급투쟁 즉, 사회혁명은 이 타이밍에 등장해 기존의 생산관계를 뒤엎고 역사는 새로운 생산양식으로 이행한다. 이러한 패턴으로 '원시 공산주의-고대 노예제-중세 봉건제-근대 자본제-미래 공산제'로 알려진 역사발전 5단계가 전개된다.

 





맑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부르주아지에 경고한다. “부르주아는 생산력을 끊임없이 변혁하지 않고서는, 따라서 생산관계와 더 나아가 사회관계 전반을 혁신하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 없다.” 그의 일갈은 변혁되지 않은 생산력이 자본가와 노동자의 관계를 불안하고 지속 불가능한 체제로 만들고, 결국 자본주의라는 생산양식은 필연적으로 종말을 맞이할 것이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주지하듯 그의 예측은 역사적 해답이 되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현대 자본주의를 개선하기 위해 <공산당 선언>이 담지하고 있는 문제의식은 톺아볼 가치가 있다.

 





<공산당 선언>은 신랄하지만 결코 차갑지 않다. 인간을 향한 맑스의 안타까운 시선이 뜨겁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체제가 수태한 인간 소외는 예나 지금이나 완전히 해소되지 않은 병적 현상이다. 그 당시 맑스가 유럽을 떠돌며 목도한 노동 현실은 사실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참혹했다. 아이들은 쪽잠을 자며 살인적인 노동을 버텼고, 여성들은 온갖 부당한 제도에 신음했으며, 이름 모를 노동자들은 커다란 공정의 톱니가 되어 삶을 삭감해 나갔다. 그가 보기에 노동자는 스스로의 노동과 생산물로부터 소외되고, 직업과 임금을 놓고 다른 노동자들과 경쟁하면서 또다시 소외를 겪는 존재였다. 여전히 사라지지 않은 인간 소외는 한국사회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특히 하청 노동자의 현실은 소외로 점철돼 있다. 타인의 직장에서 일을 하는 것부터가 소외의 시작이다. 그렇기에 일을 시킬 땐 원청, 하청할 것 없이 업무 지시를 쏟아내다가, 노동자가 다치거나 문제가 생기면 '나 몰라라' 하는 태도로 일관한다. 노동 운동이라도 하는 날엔 ‘손배 가압류’라는 탄압이 가해진다. 철저히 소외된 노동자가 과연 이 뿐일까. 내가 알고 있는 인간 소외가 지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으리란 것만을 직감할 뿐이다.

 





맑스의 자본주의 비판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는 “부르주아 사회에서는 자본이 독립적이며 인격을 갖는 반면 살아 있는 사람들은 예속되고 인격이 없는 사회”라고 갈파한 바 있다. 실제로 전 세계에서 소수의 막대한 자본이 경제적 잉여를 독식하고 있는 형국이다. 토마 피케티가 <21세기 자본>에서 자본소득 성장이 노동소득 성장을 압도하고 있다고 진단한 것처럼, 1980년 이후 세계 하위 50%의 소득은 제자리걸음이고, 상위 1%와 하위 50%의 소득 격차는 1980년 27배에서 현재 81배까지 벌어졌다. 불평등 추세가 지속될 경우 전 세계 부에서 최상위 1%의 몫은 현재 20%에서 2050년 24%로 증가하는 반면 하위 50%의 몫은 10%에서 8%로 줄어들 전망이다. 맑스는 독보적인 혜안으로 이를 ‘무한 축적의 원리’라고 정리했다. 자본은 계속 축적되면서 갈수록 소수의 손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는데 그 과정에 아무런 제약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맑스가 자본주의의 파멸을 예언한 근거이다. 다시 말해, 자본가의 몫이 기형적으로 증가하면 결국 민간 노동자들이 단결해 폭동을 일으켜 자본주의는 최후를 맞는다는 뜻이다. 그가 <공산당 선언>에서 프롤레타리아들이 공산당 혁명에서 잃을 것은 자신들을 묶고 있는 족쇄밖에 없다고 천명한 것도 이 때문이다. 아쉽게도 맑스는 어떤 사회의 민간 자본이 완전히 폐지된 경우 어떻게 그 사회를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조직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는 깊이 고민하지 않았다. 그 까닭에 현실 사회주의권은 쇠락하고 말았다. 이것이 맑스 철학의 불완전한 부분이지만, 자본주의를 향한 그의 예리한 통찰은 불평등과 사회적 빈곤이 소거되지 않은 현실 사회에서 여전히 유효하다.

 





나는 자본주의 체제를 폭력적으로 전복해야 한다는 맑스의 선언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치철학자 칼 포퍼가 제시한 ‘점진적 공학’을 통해 사회개량의 길을 걷는 게 현대 사회에 적합한 처방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맑스의 냉철한 현실 감각과 열정적 개혁 의지는 지지하고 싶다. 그래서인지 불현듯 얼마 전 타계한 황현산 문학평론가의 글이 떠오른다. “현실을 현실 아닌 것으로 바꾸고, 역사의 사실을 사실 아닌 것으로 눈가림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상상력이 뛰어나기 때문이 아니라 비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면에서 <공산당 선언>은 단연 용기 있는 책이다.

최일우 2018-11-05 추천(0)
[존재와역사부문 우수] 향연
정치외교학과 2 양*이





술자리에서 연애 이야기가 자연스레 흘러나오듯이, 고대 그리스에서 벌어진 사랑에 대한 조금 철학적인 논의가 그 옛날 소크라테스를 비롯한 철학자들로 하여금 축하연(향연)의 밤을 지새우도록 만들었다 사랑의 신 에로스는 잔인하다고 생각했던 나는 궁금증이 들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2300년 전 사람들은 사랑에 대해, 에로스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까?

『향연』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에로스로 엮인 사람들로 국가나 군대를 구성하게 되면 서로를 의식하며 추한 일들을 멀리하고 명예를 추구하게 되기 때문에 국가를 더 잘 운영할 수 있게 될 것이라는 ‘파이드로스’의 이야기였다. 에로스의 성격 중 사랑하는 상대에게 좋게 보이고 싶은 마음을 단적으로 나타낸 설명이다. 그러나 이것은 파이드로스가 말하는 에로스적 관계가 위험한 상황에서 애인을 지키려는 마음을 가장 우선으로 설명하고 있기에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에로스적 관계에 있는 상대를 가지려는 ‘욕망’뿐인 에로스라면 파이드로스의 가정은 불가능한 결과일 것이다. 하지만 남을 위해 희생할 수 있는 용기가 에로스에서 비롯될 수 있다는 것에는 동의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나 애인에게 명예롭게 보이고자 하는 마음은 고대 그리스에서나 현대 사회에서나 같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에로스는 천상의 에로스와 범속의 에로스로 나뉘기도 한다. 이는 파우사니아스가 주장한 것이데, 영혼보다 몸을 더 사랑하는 것이 범속의 에로스이고 그와 반대되는 것이 천상의 에로스이다. 사랑이란 그 자체로 미추가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행해지느냐에 따라서 아름다운지 아닌지가 결정된다는 해석이었다. 아름답게 사랑하도록 유도하는 천상의 에로스만이 찬미받을 자격이 있다고 주장한다. 에로스의 질을 나눈다는 점에서 밀이 주장한 공리주의와의 공통점을 비교할 수 있었다.

공리주의란 무엇인가. 공리주의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지향한다. 그러나 벤담의 공리주의는 절대적인 쾌락의 양을 최대로 하는 것이 선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밀은 질적으로 높은 쾌락을 극대화하는 것이 선이라고 주장한다. ‘만족한 돼지보다는 불만족한 인간이 더 낫고,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는 것이 낫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나는 공리주의와 에로스를 비교하면서 ‘그렇다면, 사랑을 나타낼 수 있는 것은, 에로스의 목적은 쾌락 뿐인가?’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여기에 대한 에뤽시마코스의 대답은 ‘아니오’일 것이다.







에뤽시마코스는 에로스를 두 가지고 나눈 것에 대해서는 동의하지만 에로스를 더욱 넓은 범주에 적용하는 모습을 보인다. 영혼과 아름다운 자들에게만 에로스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의술, 시가 기술, 천문학, 예언술을 예로 들며 의사가 해야 하는 일을 에로스에 빗대어 말한다. 의사는 사랑이 생겨나야 하는 것에 그것이 없다면 사랑을 만들어 넣어 주고, 있으면 안 되는 사랑은 제거해 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다.







시가 기술은 고음과 저음 등 서로 상극된 에로스가 하나로 조화롭게 되는 것에 대한 앎이다. 앞서 내가 제시한 물음에 대해 그는 ‘아름다움’내지는 ‘조화’라고 대답할 것이다.

조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아리스토파네스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원래 남성과 여성, 남녀추니를 합해 셋이었던 인간이 제우스에 의해 절반으로 나누어지면서 지금의 모습을 갖게 되었다고 말한다. 따라서 자신의 반쪽을 갈망한다는 논리에 이른다. 인간이 행복을 영위하기 위해 자신의 잃어버린 반쪽을 찾고자 한다는 설명은 ‘갈망’을 의미한다. 나는 이것이 앞서 말한 ‘조화’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향연』속 좌중이었다면 그의 주장에서 더 나아가 인간은 신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어울리는 것, 함께 어우러지는 것에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고 주장했을 것이다.







아가톤은 에로스가 가장 아름답고 훌륭하기 때문에 가장 행복하다고 주장한다. 에로스가 아름다운 이유는 그가 신들 가운데 가장 젊다는 것이다. 에로스는 형태가 유연하며 정의롭다고 말한다. 앞서 에로스가 용기를 얻게 해 준다는 점을 장점으로 들었던 파이드로스처럼, 아가톤은 “에로스는 누구든지 시인으로 만들 수 있는 지혜로운 시인”이라고 말한다. 사랑에 빠진 이가 사랑하는 이를 위해 자연스레 사랑의 시를 읊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다. 아가톤의 주장은 에로스의 아름다움에 찬미가 주를 이루었기 때문에, 나로서는 마지막 이야기인 소크라테스의 연설이 가장 신선했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소크라테스는 ‘디오티마’라는 가상의 인물을 통해 에로스란 가지지 못한 것을 욕망하는 것, 그리고 욕망한 것을 계속 소유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이 이야기는 매우 흥미롭다. 출산의 이유 또는 목적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새로운 충격을 가져다줄 수 있을지 모르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에로스는 분명 신으로서 존재하지만 아름다움을 결여하고 있다. 에로스는 인간에게 신들의 세계를 해석해주고 전달해주는 매개체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 에로스의 어머니는 빈곤의 신 페니아이고 아버지는 풍요의 신 포로스이기 때문에 이 둘의 성향을 다 갖추고 있다. 어머니를 닮아 항상 결핍하지만 아버지를 닮아 지혜를 추구한다. 여기에서 에로스에 대한 정의가 탄생한다. 결핍했기 때문에 욕망하는 것이다. 또한 필연적으로 지혜를 사랑하고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는 자이다. 따라서 에로스는 지혜로운 자와 무지한 자 사이에 있게 된다.







『향연』의 참가자들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이며, 이 당시에는 철학자 스승과 청년(또는 소년)제자 사이의 연애가 당연시되고 때로는 존경받기도 하는 시대였다. 그 이유는 소년 애인과의 사랑이 ‘교육’의 과정에 포함된다고 여기는 시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에로스의 기능에 대한 디오티마의 이야기에서 그것이 드러난다.







에로스의 기능은 바로 ‘출산’이다. 죽을 수 있는 자(가사자)들이 죽지 않는 자(불사자)에 가장 가까워지기 위한 방법은 출산이다. 이 말만 본다면 출산의 정의가 ‘육체적인 출산’이라고 오해할 수 있다. 이야기는 이어진다. 디오티마는 정신적인 출산에 대해서 말한다. 지혜와 박식함을 축적한 이는 정신적으로 만삭의 상태가 되고 이를 다른 곳에 출산하고자 하는 상태에 놓이게 된다.

그러나 지혜는 아름다운 것이므로 추한 곳에 그러한 지식을 낳을 수 없다. 따라서 아름다운 육체와 아름다운 정신을 지닌 소년 애인을 찾아내면 그에게 지혜를 전수하는 것이다. 디오티마는 동물의 가장 원초적인 욕구인 생식 욕구와 자식 사랑을 여기에 연결시킨다.







고대 그리스의 관점에서 벌어진, 사랑에 대한 논의를 현대의 관점에서 이해하기에는 어려움이 따를 수 있다. 그러나 욕망으로서의 사랑, 사랑하는 이에 대한 희생,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은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도 충분히 고민할 수 있는 관점이라고 생각한다. 고전을 읽는 것의 목적은 다양하다. 그러나 내가 이 책을 읽으며 갖게 된 관점은 에로스를 출산과 연결 지어 재생산으로 바라보는 신선한 관점들, 동성연애를 교육과 연관할 수 있었던 시대적 배경이나 당시의 시각, 마지막으로 현대에도 충분히 적용될 수 있는 에로스에 대한 개념들이었다. 고전은 길고 긴 세월을 지나 현대를 살고 있는 나에게 또 다른 시각을 줄 수도 있고, 고전에 담긴 인간의 모습이 우리의 삶으로 치환될 수 있다는 점에서는 엄청난 동질감을 전달해 주기도 한다. 책을 다 읽고 나서, 『향연』과 술자리의 사랑 이야기의 공통점은 인간은 약 2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사랑에 대해 고민하고, 그에 대한 생각을 다른 이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나눈다는 것이다.


 
최일우 2018-11-05 추천(0)
[지혜와자비부문 우수] 작은 것이 아름답다
법학과 2 원*빈





현대 사회는 산업혁명을 지나 지식 혁명의 시기에 이르렀다. 현재 다수의 국가들은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자유시장 경제체제를 다르고 있다. 이러한 사회 구조는 사람들 간의 경쟁을 유도하고, 이를 통해 자본의 가치를 더욱 끌어올리게 되었으며, 인간의 삶은 전보다 편리해지고, 부유해졌다. 이는 ‘경쟁’을 통해 서로 발전하고, 더 나아가 사회를 발전 시킨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효과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긍정적인 면 뒤에 숨겨진 부정적인 효과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저자는 근대 기술의 눈부신 발전이 인간은 위협한다는 사실을 이야기하고있다. 영국의 산업혁명 이후 급속도로 발전된 기술이 우리를 위협할 뿐 만 아니라, 실질적인 빈곤퇴치에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고 이야기한다. ‘발전’이라는 이름 아래 인간의 ‘욕심’이 환경을 파괴시키고 생태계의 혼란을 가져왔다. 더 나아가 인간의 삶까지 위협하고 있다. 이에 지속 가능한 개발 등을 통해 인간성을 회복하고 환경파괴를 막자는 목소리 또한 커지고 있다. 따라서 무조건 적인 기술발전이 아닌 ‘인간의 얼굴을 한 기술’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기술의 주요임무는 인간이 생명을 보전하고 잠재력을 개발하는 데 필요한 일의 부담을 덜어주는 것이리라. 기계 작동 원리를 보면, 과학 기술이 이 목적을 완수했다는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 그러나 이런 단순한 명제의 진리가 사회 전체에도 적용된다고 보기는 힘들다.”[1] 인간은 기술을 개발하고, 발전된 기술을 인간에게 편안한 기능을 제공할 수 있는 지식이다. 즉 인간을 위한 기술인 것이다. E.F 슈마허의 말처럼 인간 중심의 기술이 되어야하며, 이는 인간을 위하여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현대 사회의 고도의 발전된 기술은 과연 인간중심인가?’에 대한 재고의 필요성이 느껴진다. 오히려 기술과 전문화에 의해 인간이 지배당한다.







책에서는 ‘한 사회가 향유하는 실질적인 여가의 양은 그 사회가 이용하는 노동절약적 기계의 양에 반비례하는 경향이 있다’ 라 고 말한다. 사람이 가지는 여가는 노동을 덜어주는 기계가 적을 수록 많아진다는 뜻이다. 기술을 발전시켜 만든 기계는 인간의 노동량을 줄여주기 위함이다. 논리적으로 라면, 발전된 기술은 인간을 더 여유롭게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을 그렇지 않다. 현대사회에서 인간은 기술로 인해 전보다 더 편안한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지만 아니다. 인간은 ‘편안한’삶이 아닌 ‘편리한’ 삶을 살 고 있다. 편리함과 편안함의 차이는 무엇인가?에 대해 다시 생각 해 볼 수 있다. 편리하지만, 계속해서 노동하고 실질적으로는 더 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다. 기술이 우리의 노동을 줄여주는 것 같지만 실질적으로 다른 종류의 노동을 증가시키고 있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인간의 여유는 없어지고 게으름은 점점 죄가 되어가는 현상이 있다. 그 예로 산업 수준이 거의 바닥인 나라를 방문하면 사람들이 실질적으로 여가 시간을 갖고 즐겁게 생활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반면 기술발전이 많이 된 선진국에서는 사람들이 더 긴장된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발전하는 기술에 맞춰 가기 위해, 경쟁자가 개발할 또다른 신 기술을 먼저 개발하고 좀 더 발전시키기 위해 계속해서 인간은 쳇바퀴를 돌며 일해야 한다. 휴식, 여가는 어느새 ‘게으름’이라는 단어로 바뀌었다. 지금 쉬면 뒤쳐지고, 계속해서 일해야 한다. 현재 대한민국의 입시제도를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대한민국에서 수험생활을 했다면, 학원에, 독서실에 항상 걸려있는 ‘지금도 적들의 책장은 넘어가고있다’ ‘지금 자는 동안 나는 꿈을 꾸고, 내 경쟁자는 꿈을 이루고있다’문구를 보았을 것이다. 우리는 왜 공부를 해야하는가?는 왜 우리가 기술을 발전 해야하는가?와 같은 맥락이다. 공부를 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편안한 삶을 위해서이다. 하지만 사실 현대에 이르기까지 발전된 기술만으로도 인간은 편안한 삶을 살 수 있다. 하지만 계속해서 경쟁하며 발전하려는 기술처럼 친구들과 함께 불필요한 경쟁을 하며 ‘대학입시’라는 굴레에서 계속해서 공부한다. 잠시 휴식을 취하는 학생을 게으른 학생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잡힌다. 과연 나를 위한 공부인가? 나는 공부를 위한 것인가?라는 말처럼 발전된 인간을 위한 기술발전인가, 기술발전을 위한 인간 인가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발전된 근대 기술들이 인간을 더 쇠약하고 빈곤하게 만들었다. 빈부격차로인한 계층간 기술격차, 나라별 격차도 심각해졌으며 나아가 환경파괴에 이르기 까지 수많은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편안한 삶을 위한 기술이 아닌 편안한 기술을 위한 일하는 삶을 만들었다. 여유와 휴식을 게으름으로 만들어 인간을 계속해서 기술발전을 시키는 도구로 전락시켰다. 또한 석유등과 같은 천연 연료 고갈과 환경파괴로 궁극적으로 인간에게도 위험을 주고있다. 이로 인한 문제점을 해결하기위해 이윤을 위한 무조건적인 발전, 대량생산과 같은 인간의 노동기계화를 만다는 기술발전을 지양해야한다. 인간을 위한 기술을 만들어야 한다. 이에 저자는 파괴적이고 폭력적인 기술발전을 대체할 것은 ‘중간기술’이라고 한다. 이는 환경과 공존하고 인간을 기계를 위한 인간, 기계의 노예가 아닌 유용한 도구로써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을 말한다. 인간의 얼굴을 한 기술, 게으름을 죄로 만드는 기술이 아닌, 진짜 인간을 위한 기술이 중간기술 이라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사회적 문제해결을 넘어 궁극적인 ‘인간 얼굴을 한 기술’을 이용하는 인간의 삶과 그 사회를 볼 수 있다.

 
최일우 2018-11-05 추천(0)
[지혜와자비부문 우수] 밀린다팡하
불교학부 3 배*재



 


우리 모두는 불성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이는 불교의 평등사상을 잘 드러내는 것으로, 누구나 붓다와 같은 열반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밀린다팡하󰡕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바르게 실천하고, 알아야 할 진리를 충분히 알고, 이해하여야 될 진리를 이해하고, 제거해야 할 일을 제거하고, 수득해야 할 것을 수득하면, 그런 사람은 열반을 얻게 됩니다.” 나가세나 존자가 말한 위의 조건들을 달성하면 정말로 열반에 이를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을 가져본다. 누구나 노력하면 깨달을 수 있는 것일까? 열반으로 나아가는 길과 그것을 저해하는 업에 대해 밝혀보고, 우리에게 주어진 열반의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열반은 흔히 번뇌의 불꽃이 모두 꺼진 상태를 말한다. 번뇌는 업으로서 윤회의 원동력이 되며, 번뇌를 끊지 않고서야 열반으로 나아갈 수 없다. 열반으로의 필요조건에 대한 밀린다왕의 물음에 나가세나 존자는 이렇게 답한다.

“대왕이여, 올바른 주의와 지혜와 다른 착한 법에 의해 생을 맺지 않는 것입니다.” 올바른 주의(파지)와 지혜(절단), 다른 착한 법(계행, 신앙, 정진, 전념, 마음의 통일)은 번뇌의 단절을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공통되며, 초기불교의 수행법인 팔정도와도 관련이 있다. 팔정도는 열반으로 가기 위한 방편으로서, 검증받은 수행법이다. 팔정도의 여덟 가지 방법은 수행자가 아닌 일반인도 쉽게 접근하고, 실천할 수 있다는 점에서 보편적이다. 다시 말해, 누구에게나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길이 주어져있으며, 노력하면 누구나 열반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지금도 각처에서 많은 사람들이 수행에 전념하고 있다. 그렇다면 다들 열반을 성취하였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은 듯하다. 대체 왜 그들의 수행은 결실을 맺지 못하는 것인가? 그것은 업 때문이라고 이 책은 말한다.

“지옥에서 태어난 중생들은 몇 천 년 동안 지옥에서 그 불길에 태워지더라도 숙업의 제약에 의해 녹지 않는 것입니다. (중략) 위대한 스승이신 붓다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된 악업이 소멸하지 않는 한 죽는 일도 없다’라고.”

 

 



악업은 윤회의 원동력이자, 열반의 과정을 방해하는 것이다. 악업은 다음 생에 다시 태어나게 할 인과 연이 되어 윤회를 거듭하게 한다. 무수한 생 동안 지은 업은 무시이래로 윤회를 거듭하며 쌓여왔다. 그러한 숙업을 금생에 소멸시키는 일은 어려울 것이다. 심지어 아라한에게조차 말이다.







숙업을 지닌 아라한의 예시를 들어보자. 목갈라나의 경우를 예로 들고자 한다. 목갈라나는 사리풋타와 더불어 붓다의 상수제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아라한의 지위에 올랐으며, 뛰어난 신통력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목갈라나는 결국 도적의 몽둥이에 맞아 죽게 된다. 그 상황에서 왜 신통력을 사용할 수 없었는가, 하는 밀린다왕의 질문에 나가세나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는 것 중에서 업보만이 다른 모든 것보다 뛰어나고 유력하며, 업보만이 모두를 이기고 명령을 발합니다. 왜냐하면 업에 묶여 있는 자에 대해서는 업 이외의 나머지 작용은 활동할 기회를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생사의 윤회에서 벗어난 아라한조차도 자신의 숙업의 제약에서는 벗어나지 못하였다. 하지만 아라한과를 얻어 더 이상 윤회를 하지 않는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진정 우리가 궁금한 것은 깨달음을 얻는 과정 중에 있는 사람이 숙업의 제약을 받는 경우이다. 데바닷타의 예시를 한번 들어보자.







데바닷타는 무수한 전생 동안 수행을 거듭해왔고, 깨달을 수 있는 충분한 여건을 갖추고 있었다. 붓다와 많은 생에서 만났으며, 어느 때는 붓다보다도 더 훌륭한 수행자였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데바닷타는 붓다를 시해하려다 지옥에 떨어졌다. 어째서 데바닷타는 부처님을 시해하고자 했던 것일까? 그것 역시도 숙업의 제약으로 볼 수 있다.







과거 무수한 생 동안 붓다를 모함하고 죽인 업이 습관으로 남아, 벗어나기 힘들 정도의 업의 제약이 데바닷타에게는 있었다. 결국 데바닷타는 금생에도 같은 과오를 범하게 된다. 붓다의 과거 생에서는 아직 깨닫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에 데바닷타의 해코지가 상대적으로 큰 업을 낳지는 않았을 것이지만, 이번 생은 달랐다. 죽이려는 대상이 단순한 수행자가 아닌, 붓다였던 것이다. 데바닷타도 그것을 몰랐던 것은 아니다. 다만, 업의 제약을 거스르는 것이 힘들었을 뿐이다.







이처럼 데바닷타와 목갈라나의 사례에서 숙업의 제약이 미치는 영향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도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다. 무수한 세월 동안 지은 악업으로 열반에 들지 못한 채 끊임없이 윤회하고 있고, 그마저도 숙업의 제약을 받고 있는 것이다.

한편, 모든 사람이 업의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면, 우리 모두는 규정된 미래를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들 수 있다. 하지만 불교는 숙명론을 말하지 않는다. 우리 개개인이 주체가 되어 불확실한 미래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업의 굴레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과연 무엇인가? 업의 제약을 뛰어넘어, 모두가 깨달음의 길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일까?

우리 모두는 악행으로 인한 악업을 짓고 있으며, 그렇게 쌓여온 업은 해탈을 이루는 데 제약이 된다. 아무리 많은 선행을 한다고 하더라도 악행을 더 이상 짓지 않게 되는 것은 아니다. 매 순간 우리는 끝없는 악업을 짓고 있기 때문이다. 말로, 행동으로, 그리고 생각으로 쉴 새 없이 악행을 저지른다. 선행을 한 시간보다 악행을 한 시간이 더 많을 정도로 말이다.







비록 많은 악행을 저지르고 있기는 하나, 모든 사람의 열반이 점점 퇴보하는 것은 아니다. 선행은 악행보다 더 큰 영향력을 가지며, 선행의 과보가 악행의 과보보다 더 크기 때문이다. 이는 데바닷타의 사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데바닷타는 이전의 무수한 생 동안 붓다보다도 더 우월한 위치에서 나고 죽음을 거듭하였다. 그것은 어느 때에 데바닷타가 붓다의 지위에 오를 정도의 선행을 닦은 공덕으로 인한 것이다. 이처럼 선업은 악업을 능가할 정도로 큰 영향력을 지닌다.







하지만 그러한 선행도 데바닷타를 열반의 경지로 이끌지는 못하였다. 앞서 언급한 숙업의 제약 때문이었다. 물론 한 일생의 선행만으로도 붓다가 될 수는 없다. 무수한 생 동안의 선행을 통해 공덕을 쌓아야 할 뿐더러, 깨달음을 가져다 줄 인연을 만나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선행을 소홀히 하여서는 안 된다. 단 한 번의 선행이 큰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으니 말이다.

방일하지 말고 정진하라. 붓다의 마지막 말이다. 붓다는 모든 것은 무상하다는 제행무상을 설하며, 이와 같이 말했다. 종종 선행뿐만 아니라 모든 일에서 안일한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이번 한 번 쯤이야, 이번은 괜찮겠지, 하며 순간의 유혹에 합리화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순간, 지옥에 떨어진 데바닷타처럼 무수한 생 동안 고통을 받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자각해야 한다.







전생과 내생을 이야기하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현재’를 중시하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느냐에 따라 깨달음에 가까워질 수도, 혹은 멀어질 수도 있다. 현생에 깨달을 수도 있고, 깨닫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나의 행동이 언젠가는 깨닫게 되는 인연을 불러올 수 있다. 나의 ‘지금’은 소중하다.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누구나 노력하면 깨달을 수 있을까? 그 해답은 ‘깨달을 수 있다’이다. 우리 모두에게는 열반의 가능성이 주어져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금생에’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숙업의 제약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금생의 노력이 의미 없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금 강조하고 싶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큰 결과를 가져올 수 있고, 어쩌면 깨달음으로 인도해줄 선지식을 만날 인연이 생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의 지금을 소중히 여기자.

최일우 2018-11-05 추천(0)
[지혜와자비부문 최우수] 한 원자 속의 우주
물리반도체학부 2 신*호





나는 종교를 공부해 본 적이 없다. 종교에 대해서 별로 알고 싶지도 않았다. 오래 전 종교의 힘이 막강하던 시기인 16세기경 지구가 만물의 중심이라는 천동설이 지배적이었다. 당시 천문학자이자 물리학자였던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금성의 위성 변화를 설명할 수 없는 천동설에 대해 반박하며 지동설을 주장했다. 하지만 막강한 힘을 가졌던 종교 세력이 천동설을 주장하던 시대였기에 결국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종교재판에 서게 되었고, 이로 인해 자칫 목숨을 잃을 뻔하였다. 현대에 와서는 텔레비전이나 핸드폰에서 종교로 인해 인생이 바뀌어버린 사람들의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종교에 심취해 모든 재산을 종교 재단에 기부해 가정을 파탄시킨 사람들의 사례를 자주 접할 수 있다. 하지만 종교 세력은 종교라는 이름 아래 이러한 기부 행위를 정당화시키며 장려하고 있다. 결국 과거와 현재의 종교가 보여준 이러한 부정적 모습들은 나로 하여금 종교에 대해 좋지 않은 인식을 갖게 만들었다. 이러한 이유로 종교와 달리 이성적으로 보이는 과학만이 삶의 진리라고 믿어왔다. 따라서 비과학적인 모습들만 보여준 종교의 존재 가치는 그저 마음 한 구석 불안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치료하는 일종의 ‘도구’ 따위로 생각했었다.







그동안 여러 매체들을 통해서 수도 없이 보았다. 종교와 과학이 대립하는 모습들을. 예를 들어 앞서 말한 갈릴레이가 종교 재판에 서게 된 것처럼. 하지만 『한 원자 속의 우주』를 읽고 나서 종교와 과학의 근간이 어쩌면 비슷한 생각에서 출발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개념을 확립하는 것에 있어서 과학과 불교의 근원은 유사하다는 것이다.







겉모습은 다르지만



과학은 물질적 세계의 어떤 현상을 관찰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이론적 일반화를 이끌어 내고, 우리가 그 이론을 가지고 정확한 실험을 되풀이 할 때 지식의 일부로서 받아들여진다. 결과적으로, 과학은 경험적 실험에서 움직이기 시작하여 합리적 적용을 포함한 개념적 사고 과정을 거쳐서 이성에 바탕을 둔 이해를 증명하기 위한 다음 실험에 이르러 그 절정을 이룬다. 그러나 만약, 이 과정에서 실험이 이론과 어긋나면 손질되어야 할 것은 이론이다.







불교는 비록 경전과 예배 의식이라는 특정 형태를 가지고 발달한 종교이지만, 엄격히 말해서 불교 경전의 권위는 이성과 경험을 능가할 수 없다. 절대적일 것만 같던 부처님이 하신 말씀 역시도 제외의 대상이 아니다. 단순히 부처님에 대한 숭배의 의미로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말고 합리적 검사와 개인적 경험을 가지고 가르침을 배워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는 “불교는 어떤 주장의 정당성이 드러날 때, 불교는 경험 쪽에 가장 높은 권위를, 이성 쪽에 두 번째를, 경전 쪽에 가장 낮은 권위를 부여한다.”라는 달라이 라마의 말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요약하자면 현재 완성된 모습은 다르지만, 우리가 과학이라는 학문을 만들어 내고 발전시키고 터득해 나아가는 방식과 불교에서 경전을 만들고 배워나가는 방식에서 두 학문 모두 경험을 토대로 확립해 나아간다. 이러한 모습에서 이 둘은 상당히 닮아 있다. 책 역시 경험적 측면에서 두 학문은 근본이 같음을 말하고 있다.

 





모든 것은 독립적일 수 없다



불교에서 아주 중요한 철학적 통찰들 중 하나는 공사상이다. 그리고 이 공사상을 핵심으로 만들어진 철학이 바로 공관 철학이다. 주관적인 생각이지만 나는 공관 철학에 대해서 읽고 나서 상당히 흥미로웠다. 공관철학에 따르면 우리는 큰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 있다. 우리는 모두 우리의 존재를 구성하는 신체적 정신적 요소들과 관계없이 독자성을 차별적인 자아로서 특징 짓는다. 하지만 공관 철학의 관점에서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모든 물질과 사건들은 물질적이든지 정신적이든지 또는 시간 따위의 추상적 개념이든지 간에 객관적이고 독립적인 존재가 없기 때문이다.







약 16세기경 저명한 과학자였던 돌턴은 원자라는 개념을 세상에 알렸다. 그리고 돌턴을 비롯한 세상 사람들은 이 원자는 모든 물질을 구성하는 요소이며 여러 종류의 고유한 것이 있고, 또 각각의 것 그 자체로 더 이상 쪼개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말하자면 원자라는 것은 완전하며, 객관적이고 독립적인 것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모든 원자 속에는 이보다 작은 전자, 양성자, 중성자와 같은 것들이 있음이 밝혀졌다. 지금은 그 누구도 함부로 “이것이 가장 근본이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내가 과학에서 가장 흥미와 호기심을 느끼는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다. 연구가 계속될수록 그와 관련된 많은 새로운 것들이 생겨나는 것. 즉, 완전한 물질이라고 생각했었던 것조차도 사실은 완전한 것이 아니었고, 각각이 독립적으로 보이는 것일지라도 사실은 상호간에 연관성이 있다는 것. 분명히 눈에 보이지 않는 종류의 것이지만, 공관 철학은 이를 그 자체로 독립적인 물질은 없다는 큰 맥락에서 담고 있는 모습이 상당히 흥미롭다.

 





발견되지 않은 것



말장난처럼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발견되지 않은 것’과 ‘존재하지 않음이 확인된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그리고 이 두 명제가 일치하기 위해서는 찾는 방법과 찾고자 하는 현상이 걸맞아야 한다. 이 말은 나를 상당히 혼란스럽게 만들었지만, 동시에 꽤 깊은 생각에 잠기게 했다. 하지만 과학에 빗대어 생각해보자니 이해가 되었다. 과학의 한 분야에 속하는 고전역학은 실재하는 것을 연구하고 이에 대한 이론을 만들어 냈다. 하지만 또 다른 과학의 분야인 양자역학은 눈에 보이지 않는, 실재하는지 확신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연구하고 이를 실험한다. 이제는 이전까지 존재하는지조차 몰랐던 것들을 연구하고 있는 단계인 것이다. 왜 이전까지는 이에 대해 실험하고 연구할 수 없었을까? 왜냐하면 이를 찾을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즉 이전에는 전자나 핵과 같은 것에 대해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과학 속에서 이해했던 것처럼 종교 역시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은 윤회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생각해보면 이 명제는 ‘아직 발견되지 않은 것’에 속한다. 왜냐하면 위의 두 명제 ‘발견되지 않은 것’과 ‘존재하지 않음이 확인된 것’이 일치하기 위해서는 ‘찾는 방법’과 ‘찾고자 하는 현상’이 걸맞아야 한다. 하지만 ‘인간이 윤회하지 않음’을 찾을 수 있는 알맞은 방법이 없기 때문에 ‘인간은 윤회하지 않는다.’라고 말할 수 없다. 이는 ‘신은 존재한다.’라는 명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종교가 없다. 신 혹은 다른 영적인 존재에 대해서 전혀 믿지 않는다. 다만 책을 읽으면서 과학 속에서는 무의식적으로 이해했던 ‘아직 발견되지 않은 것’이라는 명제를 불교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예를 들자면 돌턴의 원자 이론의 불완전함이 밝혀진 것처럼 ‘인간은 윤회하지 않는다.’라는 명제 역시도 아직 확신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는 ‘아직 발견되지 않은 것’이며, 가능성을 품고 있는 것이라고 말이다.



 



나오며



『한 원자 속의 우주』는 달라이 라마가 그 당시의 저명한 과학자들을 만나며 이들과의 이야기를 통해 불교와 과학이 상당히 닮아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부끄럽지만, 나는 불교라는 학문이 과학과의 공통점을 찾아서 학문으로서 과학과 대등한 권위를 가지려고 한다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종교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나타난 아둔한 생각일 뿐이었다. 빛이 미시적 관점에서는 입자이기도 하고 거시적 관점에서는 파동이기도 한 것처럼 작은 맥락에서는 서로가 달라 보일 수 있지만, 큰 맥락에서는 분명히 특정 부분을 공유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특히 경험적 측면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과학과 종교는 서로 닮았다는 내용은 나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종교는 거짓을 주장하며 갈릴레오를 법정에 세웠다. 그러나 원자설을 주장했던 시대, 과학 역시 거짓말을 했다. 생각해보면 과학의 거짓말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사고’로 받아들여지고 종교의 거짓말은 있어서는 안 될 ‘사건’으로 인식된다. 그래서 결국 과학의 거짓말은 기억 속에 오래 저장되지 않는다. 내가 종교에 대해 갖고 있었던 부정적인 고정관념은 과학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착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제 어느 쪽이 더 우월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둘은 결국 같은 근본을 지니며 각기 다른 방향을 걷고 있을 뿐이다.


 
최일우 2018-11-05 추천(0)
우수이미지 [공통부문 대상] 인간 불평등 기원론
사회언론정보학부 2 이*현

 



부지런한 노동을 끊임없이 반복하지만 엉겨 붙은 가난의 비참은 행복에 대한 간절함을 외면한다. 특정 집단의 사유를 확대시켜주는 인적 자본을 향한 경쟁이 과열되고, 자본의 소유에 따라 기회가 제한되는 불공정한 사회 속에서 우울의 염증이 돋아난다. 현대 사회는 흐무러지게 피어난 불평등의 악덕이 삶의 현장에 내려앉아 고통의 거름이 되고 있는 시대이다. 이에 구성원들은 불평등에 대한 경멸과 체념, 타개 의지와 특권층 편승 욕구라는 왜곡 사이에서 무기력을 경험한다. 인간 구별 행위가 비극으로 귀결됨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현대 사회에서 불평등의 기원과 정당성에 대한 논의는 이를 생산하는 현시대의 정형화된 행동 양식에 의문을 제기한다. ‘인간 불평등 기원론’은 ‘인간 사이의 불평등의 기원은 무엇이며, 불평등은 자연법에 의해 허용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루소의 현답이다.







루소는 자연법에 위배되는 불평등의 기원을 원초적 자연 상태에서의 문명화된 사회로의 이행 과정을 통해 설명한다. 그에 의하면 원시 상태의 인간은 타인과의 상호작용을 이루지 않음으로써 선악에 대한 개념을 향유하지 않았고, 자족 생활에 필요한 지적 능력과 감정만을 지니고 있었다. 지능의 개발과 자본의 세습이 진행되지 않았으며, 세월의 진보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즉, 원시인은 자아의 보호와 타자를 향한 연민이라는 본성에 따라 행위 하는 존재로서 예속과 규칙의 지배에 얽매이지 않았던 것이다.







타인과의 교류가 없었던 고독의 생활 속에서 자유의 행복을 충족했다고 논술하는 루소의 철학은 사회 구성원으로서 원활한 대인관계를 강조하는 현대 사회의 지배적 가치관을 재고하는데 기여한다. 문명화된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비사회적 동물로서의 인간 양태는 낯선 대상이며, 현대인은 인간관계에서의 안정과 인정으로의 항해를 지속한다. 그러나 인간관계에 관한 서적과 지혜, 의견이 범람하는 현 시대의 상황은 인간 사이의 속박에 얽매인 현대인들의 고통을 상징한다. 즉, 타자와의 관계 맺음을 통한 선악의 구별과 지식의 축적 및 세습, 규율의 준수로부터의 구속에 놓인 현대인은 평등과 자유를 충족하지 못하는 상태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생활양식의 형성 이유와 문제의 원인은 무엇인가?







루소는 차이의 인지에 따른 비교 개념과 소유욕의 결탁을 답으로 제시한다. 원시의 인간은 자연적 장애물과 인구 증가에 따른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협력을 도모했다. 그들은 결합을 통한 생존의 유리함을 경험하면서 지속적인 교류를 형성하였다. 이에 공동생활이 이루어짐에 따라 비교의 개념이 생성되고, 인정과 존경의 욕구, 허영과 수치의 감정이 탄생했다. 이러한 초기 협력 상태는 독립에 기반한 교류가 이루어지던 때이다. 루소에 따르면, 이 시기가 자기 보존의 욕구와 연민의 본성에 기초하여 자유와 선량, 행복을 추구했던 ‘세계의 진정한 청춘기’이다.







루소는 대인관계가 초래하는 고통의 원인으로 ‘비교와 인정 욕구’를 제시하며, 불평등의 초석으로 작용했다고 언급한다. 즉, 차이에 대한 인식이 인간 존재의 상대화를 야기했다는 것이다. 현대인 역시 차이에 의한 비교 의식에 관해 문제의식을 지니고 있다. 타인과의 비교에서 오는 상대적 박탈감에서 벗어나 자신의 가치를 인지하고 계발하라는 말은 현대 사회에서 천명과 같이 잔존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방식은 인류 역사의 안정되고 행복한 시기였던 때를 지난 현 시대에서 중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 현대 사회는 상호 독립적인 관계에서 일시적 협력과 교류를 형성하는 시공간이 결코 아니다. 전문화된 분업 상태의 지속으로 적극적 의존이 진행되고 있으며, 자본의 범위가 경제와 문화, 사회와 상징으로 확대됨과 동시에 자본의 소유가 권력의 근원으로 작용하고 있다. 즉, 현대는 다수의 상황에서 타자와의 능동적인 상호작용이 요구되는 사회이며, 개인이 자본을 통해 권력을 소유한 계층의 지배에 의한 수동적 행위자로 전락하게 된 사회이다. 공동체의 형성과 타인과의 교류에 의해 인지된 차이가 일반 개인에 의한 평가, 존경받고자 하는 욕구, 인정과 질투의 감정만을 야기하는 시기가 지난 것이다. 차이가 불평등의 원인이 되며, 사회 구조를 통해 재생산되고 있는 현 시대에서 아래와 같은 루소의 통찰은 귀감이 된다.







루소는 차이와 차별의 매개변수를 ‘소유’로 규정하며 불평등의 제도화를 설명한다. 비교 의식이 소유와 결집됨에 따라 평등과 자유의 붕괴가 진행됐다. 야금술과 농업의 발달이 생산성의 확대를 초래하며 소유에 따른 차이를 증대시키고, 인간을 소유의 가치로 종속시켰다. 또한 상속으로 인해 특정 집단의 토지 사유화가 지속되고, 공동 재산의 개념이 몰락하게 되었다. 횡령과 약탈과 같은 방종한 정념은 본성에 의한 연민을 억제시킴으로써 인간 사이의 갈등과 잔인한 분쟁을 야기했다. 무질서 상태에서의 소유에 대한 위협을 타개하고자 부자들은 법률과 제도를 창안했다. 이로써 부자의 특권과 빈자의 예속이 제도화되었다. 질서라는 명목 하에 불평등은 심화되고 각종 정부 형태를 통해 권력 관계가 공고화되었다. 루소는 정치적, 도덕적 불평등이 신체적 불평등과 균형을 이루지 못할 경우, 자연법에 위배된다고 역설하며 책을 마무리한다.







이와 같이 개인의 우수성이라고 평가받는 타자와의 특별한 차이가 소유에 대한 욕망과 결합하며 불평등을 생산했으며, 사회의 법과 제도는 부와 권력의 지속적 소유를 정당화하였다. 또한 권력과 위신에의 굴종과 불공정 대우의 인정을 체화시켰으며, 비교우월성과 서열화에 따른 차별적 대우를 합리적인 것처럼 공작했다. 개인은 노동하는 존재로서 소유를 통한 지배 계층의 성실한 자본 축적 수단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현대 사회 또한 개인의 자연적 불평등을 특수한 역사적 맥락 내에서 사회적 주요 가치와 요구에 의해 평가 및 재단함으로써 사회적 불평등의 독립변수로 기능하게끔 만들고 있다. 평등과 자유의 미명을 외치고, 개방된 기회를 통한 정당한 경쟁이 이루어질 수 있는 사회임을 역설하지만 기회는 자본에 의해 제한되고, 경쟁의 공정성은 좌절된다. 이는 직업 선택에서의 한계를 통해 이해할 수 있다. 모든 구성원은 일하고자 하는 분야에 자유롭게 도전할 수 있다는 명목이 존재한다. 그러나 사회 지배 계층에 의해 해당 업종에서 종사할 수 있는 통로가 형성되며 개인이 소유한 자본에 따라 기회로의 접근성이 상이해진다. 아울러 평등을 추구하고자 인위로 생산하고 있는 법과 제도들이 정서적 불평등을 잉태하고 있다. 빈자와 사회적 약자가 자신의 경제적 곤란과 신체적 불편, 사회적 무능력 등을 증명하게 만들며 사회 계층을 구별하고, 의식적 측면에서의 불평등과 좌절을 재생산하는 것이다. 복잡화와 다원화가 진행되는 현대 사회에서는 불평등의 양상이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이는 불평등을 경험하는 맥락이 증대됨을 시사하며, 불평등으로 인해 주체로서 행위 하지 못하고 종속된 상태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고통 양상이 확장됨을 함의한다. 다채로운 자본의 소유가 이러한 불평등 양상의 토대가 되고 있으며, 사회 지배 계층의 상호작용을 통한 제도적 장치에 의해 합리화되고 있다는 점에서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은 현대 사회에서도 의의를 지닌다.







루소는 본 도서를 통해 자연법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법의 강제를 받는 사람의 의지가 그 법을 의식하고 그것에 복종할 수 있어야 할 뿐 아니라, 그것이 자연적이기 위해서는 그 법이 자연의 소리에서 나와야 한다는 점이다.” 이성적 존재로서 자연법을 수호하며, 진정한 자유와 평등을 경험하였던 원시적 자연 상태 인간의 삶은 불평등의 고착화가 이루어진 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과 선명한 대비를 이룬다. 지혜와 지식이 사회 지배층의 특권을 유지하는데 활용되며, 문화가 계급의 구별과 타자화를 정교화 하고, 자유와 평등에 대한 존중을 공유한다고 사고하지만 인위적인 법과 제도의 질서에 편입되어 스스로의 행위를 재단하는 현 시대에서 연민의 본성은 소유욕의 도구로 기능할 뿐이다. 소유를 향한 욕망의 목소리에 자연의 소리가 포식됐으며, 인간 의식을 전복시킨 실정법이 자연법에의 복종을 좌절시켰다. 기초 생활의 결핍을 충족하지 못한 채 가난의 굴레에 매몰되는 사람들을 사회적으로 도태시키면서 이루어지는 자본 소유자들의 향연, ‘불평등’. 이것이 초래한 비가시적 학대가 본 도서를 통해 체현되고 있다. 소유에 의한 굴종과 지배가 자유와 평등을 질식시키는 현재, 진정한 인간 본성 실현에 대한 다수의 갈망과 성찰은 신선한 호흡을 제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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