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렵 채집민에서 식량 생산자로의 변화는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가진다. 지역에 따른 식량 생산의 시기적 차이가 역사를 바꾸었기 때문이다. 다른 지역보다 앞서 시작했는지, 뒤늦게 시작했는지, 또는 독립적으로 발원되었는지, 다른 지역의 영향을 받아 비독립적으로 발원되었는지가 유산자와 무산자를 갈라놓았다. 유산자와 무산자의 차이는 단지 농업의 힘을 가졌는가에 국한된 것만은 아니었다. 식량 생산 능력은 곧 그 지역의 발달 정도를 의미했다.
야생동식물의 가축화, 작물화가 이루어지며 점차 소비열량이 높아졌다. 또, 가축과 작물을 지키려다 보니 한곳에 정착하여 생활하게 되었다. 그 결과 먹여살릴 수만 있다면 언제든지 아기를 낳을 수 있는 조건이 되었다. 유목민의 경우 수유기를 고려하면 약 4년 정도의 산이가 생기는 반면 정주인들은 그렇지 않았다. 산이가 좁아지자 인구가 조밀해졌고, 많은 인구는 곧 군사적 이점을 의미했다. 다른 지역을 정복하거나 방어할 충분한 힘이 축적되는 것이다.
식량 생산이 안정기에 접어들자 일부 머리 좋은 사람들이 정치계급을 형성했다. 이 엘리트 계급은 정치에만 집중하며 효율적으로 식량을 통제하였다. 점차 식량 공급이 안정되며 전문가도 생겨났다. 전문 사제, 금속 기술 숙련공, 필경사 등, 오늘날 현대 사회에서 보이는 분업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사회는 계급화되어갔고, 전문가들이 생겨나며 군사, 기록, 등 여러 방면으로 발전을 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식량 생산이 더딘 곳은 먹고 사는 것 조차 불안정하여 분업화는 물론 발전된 사회 구조를 형성할 수 없었다. 고작해야 '추장과 나머지 사람들' 정도에 머무른 것이다. 이처럼 식량 생산은 유산 지역과 무산 지역 사이에 사회 발달 정도에 있어서 빠른 속도로 차이를 만들어냈다.
그렇다면 독립적으로 식량 생산이 발원된 곳에서는 어떤 이유로 가축화, 작물화가 시작된 것일까? 서남아시아, 중국, 중앙아메리카, 안데스 산맥 일대는 독립적인 발원지로서 오늘날 오히려 다른 지역보다 황폐하다고 취급되는 장소이다. 저자는 크게 두가지 가설을 제시한다. 말 그대로 독립적으로 가축화와 작물화가 이루어졌다는 것, 그리고 다른 지역에서 창시 작물이 들어와 우연히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이집트와 유럽의 대서양 연안은 창시작물을 들여와 스스로 농경민이 된 경우이다. 어떤식으로 식량 생산이 시작되었는지는 설명할 수 있다 치더라도, 시기와 양상이 이처럼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시작된 곳에서 하나같이 비슷한 방향으로 사회가 발전한 이유는 무엇일까? 결과가 무엇이건, 식량 생산의 시기적 차이가 부족의 운명을 결정지은 것은 분명하다. 식량 생산은 곧 분업화된 사회를 의미했고 이것이 부족의 경쟁력과 생존력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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