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학부 3 배*재
우리 모두는 불성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이는 불교의 평등사상을 잘 드러내는 것으로, 누구나 붓다와 같은 열반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밀린다팡하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바르게 실천하고, 알아야 할 진리를 충분히 알고, 이해하여야 될 진리를 이해하고, 제거해야 할 일을 제거하고, 수득해야 할 것을 수득하면, 그런 사람은 열반을 얻게 됩니다.” 나가세나 존자가 말한 위의 조건들을 달성하면 정말로 열반에 이를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을 가져본다. 누구나 노력하면 깨달을 수 있는 것일까? 열반으로 나아가는 길과 그것을 저해하는 업에 대해 밝혀보고, 우리에게 주어진 열반의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열반은 흔히 번뇌의 불꽃이 모두 꺼진 상태를 말한다. 번뇌는 업으로서 윤회의 원동력이 되며, 번뇌를 끊지 않고서야 열반으로 나아갈 수 없다. 열반으로의 필요조건에 대한 밀린다왕의 물음에 나가세나 존자는 이렇게 답한다.
“대왕이여, 올바른 주의와 지혜와 다른 착한 법에 의해 생을 맺지 않는 것입니다.” 올바른 주의(파지)와 지혜(절단), 다른 착한 법(계행, 신앙, 정진, 전념, 마음의 통일)은 번뇌의 단절을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공통되며, 초기불교의 수행법인 팔정도와도 관련이 있다. 팔정도는 열반으로 가기 위한 방편으로서, 검증받은 수행법이다. 팔정도의 여덟 가지 방법은 수행자가 아닌 일반인도 쉽게 접근하고, 실천할 수 있다는 점에서 보편적이다. 다시 말해, 누구에게나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길이 주어져있으며, 노력하면 누구나 열반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지금도 각처에서 많은 사람들이 수행에 전념하고 있다. 그렇다면 다들 열반을 성취하였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은 듯하다. 대체 왜 그들의 수행은 결실을 맺지 못하는 것인가? 그것은 업 때문이라고 이 책은 말한다.
“지옥에서 태어난 중생들은 몇 천 년 동안 지옥에서 그 불길에 태워지더라도 숙업의 제약에 의해 녹지 않는 것입니다. (중략) 위대한 스승이신 붓다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된 악업이 소멸하지 않는 한 죽는 일도 없다’라고.”
악업은 윤회의 원동력이자, 열반의 과정을 방해하는 것이다. 악업은 다음 생에 다시 태어나게 할 인과 연이 되어 윤회를 거듭하게 한다. 무수한 생 동안 지은 업은 무시이래로 윤회를 거듭하며 쌓여왔다. 그러한 숙업을 금생에 소멸시키는 일은 어려울 것이다. 심지어 아라한에게조차 말이다.
숙업을 지닌 아라한의 예시를 들어보자. 목갈라나의 경우를 예로 들고자 한다. 목갈라나는 사리풋타와 더불어 붓다의 상수제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아라한의 지위에 올랐으며, 뛰어난 신통력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목갈라나는 결국 도적의 몽둥이에 맞아 죽게 된다. 그 상황에서 왜 신통력을 사용할 수 없었는가, 하는 밀린다왕의 질문에 나가세나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는 것 중에서 업보만이 다른 모든 것보다 뛰어나고 유력하며, 업보만이 모두를 이기고 명령을 발합니다. 왜냐하면 업에 묶여 있는 자에 대해서는 업 이외의 나머지 작용은 활동할 기회를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생사의 윤회에서 벗어난 아라한조차도 자신의 숙업의 제약에서는 벗어나지 못하였다. 하지만 아라한과를 얻어 더 이상 윤회를 하지 않는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진정 우리가 궁금한 것은 깨달음을 얻는 과정 중에 있는 사람이 숙업의 제약을 받는 경우이다. 데바닷타의 예시를 한번 들어보자.
데바닷타는 무수한 전생 동안 수행을 거듭해왔고, 깨달을 수 있는 충분한 여건을 갖추고 있었다. 붓다와 많은 생에서 만났으며, 어느 때는 붓다보다도 더 훌륭한 수행자였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데바닷타는 붓다를 시해하려다 지옥에 떨어졌다. 어째서 데바닷타는 부처님을 시해하고자 했던 것일까? 그것 역시도 숙업의 제약으로 볼 수 있다.
과거 무수한 생 동안 붓다를 모함하고 죽인 업이 습관으로 남아, 벗어나기 힘들 정도의 업의 제약이 데바닷타에게는 있었다. 결국 데바닷타는 금생에도 같은 과오를 범하게 된다. 붓다의 과거 생에서는 아직 깨닫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에 데바닷타의 해코지가 상대적으로 큰 업을 낳지는 않았을 것이지만, 이번 생은 달랐다. 죽이려는 대상이 단순한 수행자가 아닌, 붓다였던 것이다. 데바닷타도 그것을 몰랐던 것은 아니다. 다만, 업의 제약을 거스르는 것이 힘들었을 뿐이다.
이처럼 데바닷타와 목갈라나의 사례에서 숙업의 제약이 미치는 영향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도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다. 무수한 세월 동안 지은 악업으로 열반에 들지 못한 채 끊임없이 윤회하고 있고, 그마저도 숙업의 제약을 받고 있는 것이다.
한편, 모든 사람이 업의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면, 우리 모두는 규정된 미래를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들 수 있다. 하지만 불교는 숙명론을 말하지 않는다. 우리 개개인이 주체가 되어 불확실한 미래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업의 굴레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과연 무엇인가? 업의 제약을 뛰어넘어, 모두가 깨달음의 길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일까?
우리 모두는 악행으로 인한 악업을 짓고 있으며, 그렇게 쌓여온 업은 해탈을 이루는 데 제약이 된다. 아무리 많은 선행을 한다고 하더라도 악행을 더 이상 짓지 않게 되는 것은 아니다. 매 순간 우리는 끝없는 악업을 짓고 있기 때문이다. 말로, 행동으로, 그리고 생각으로 쉴 새 없이 악행을 저지른다. 선행을 한 시간보다 악행을 한 시간이 더 많을 정도로 말이다.
비록 많은 악행을 저지르고 있기는 하나, 모든 사람의 열반이 점점 퇴보하는 것은 아니다. 선행은 악행보다 더 큰 영향력을 가지며, 선행의 과보가 악행의 과보보다 더 크기 때문이다. 이는 데바닷타의 사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데바닷타는 이전의 무수한 생 동안 붓다보다도 더 우월한 위치에서 나고 죽음을 거듭하였다. 그것은 어느 때에 데바닷타가 붓다의 지위에 오를 정도의 선행을 닦은 공덕으로 인한 것이다. 이처럼 선업은 악업을 능가할 정도로 큰 영향력을 지닌다.
하지만 그러한 선행도 데바닷타를 열반의 경지로 이끌지는 못하였다. 앞서 언급한 숙업의 제약 때문이었다. 물론 한 일생의 선행만으로도 붓다가 될 수는 없다. 무수한 생 동안의 선행을 통해 공덕을 쌓아야 할 뿐더러, 깨달음을 가져다 줄 인연을 만나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선행을 소홀히 하여서는 안 된다. 단 한 번의 선행이 큰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으니 말이다.
방일하지 말고 정진하라. 붓다의 마지막 말이다. 붓다는 모든 것은 무상하다는 제행무상을 설하며, 이와 같이 말했다. 종종 선행뿐만 아니라 모든 일에서 안일한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이번 한 번 쯤이야, 이번은 괜찮겠지, 하며 순간의 유혹에 합리화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순간, 지옥에 떨어진 데바닷타처럼 무수한 생 동안 고통을 받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자각해야 한다.
전생과 내생을 이야기하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현재’를 중시하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느냐에 따라 깨달음에 가까워질 수도, 혹은 멀어질 수도 있다. 현생에 깨달을 수도 있고, 깨닫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나의 행동이 언젠가는 깨닫게 되는 인연을 불러올 수 있다. 나의 ‘지금’은 소중하다.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누구나 노력하면 깨달을 수 있을까? 그 해답은 ‘깨달을 수 있다’이다. 우리 모두에게는 열반의 가능성이 주어져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금생에’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숙업의 제약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금생의 노력이 의미 없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금 강조하고 싶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큰 결과를 가져올 수 있고, 어쩌면 깨달음으로 인도해줄 선지식을 만날 인연이 생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의 지금을 소중히 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