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품생명공학과 2 이*수
『향연』은 다채로운 관점을 통해 사랑 즉, 에로스에 대한 다양한 시각 및 수준을 보여준다. 『향연』 속에 등장하는 에로스는 주로 ‘X의 에로스’ 즉, X에 대한, X에 향한 에로스로 표현된다. 이는 에로스가 그 자체로 정의될 수 없음을 말하며 ‘무엇과의 관계’ 속에서만 정의됨을 뜻한다. ‘무엇과의 관계’는 형제와 자매의 관계로 쉽게 설명되는데, 동생은 형과 언니와의 관계를 통해서만 규정될 수 있듯이 에로스도 X와의 관계를 통해서만 규정된다.
X에 대한, X에 향한 에로스라는 표현에서와 같이 에로스는 X(어떤 것)을 욕망한다. 어떤 것을 욕망한다는 것은 동시에 어떤 것이 결핍 되어있음을 나타낸다. 욕망과 결핍의 상관성은 다음과 같은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이미 소유하고 있는 것을 욕망하는 것은 어떻게 설명이 가능한가? 건강한데도 건강하기를 바라고, 부자인데도 또한 부자이기를 바라는 것은 건강과 부와 같은 욕망하는 대상이 언젠간 상실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는 X(어떤 것)이 나중에도 늘 지속되고 영원히 곁에 있기를 바란다.
에로스가 자신이 결여하고 갖고 있지 않은 것을 사랑한다면, 과연 에로스는 아름다운 것인가? 좋은 것들이 아름답기도 하다면, 과연 에로스는 좋은 것인가? 이와 같은 질문에 대해 다오티마는 중간자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답을 도출해 낸다. 지금까지 합의된 것에 따르면, 에로스는 아름답지 않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아름답지 않다’는 상태는 아름답다와 대립되는 단어인 추함이 아니다. 아름다움과 추함 사이에 있는 그 어떤 것이며 마찬가지로, 에로스는 좋은 것과 나쁜 것 사이에 존재하는 그 어떤 것이다. 더 나아가, 에로스는 지혜로운 것과 무지한 것 사이의 ‘의견은 있지만 근거가 부재된 상태’의 것이다. 다오티마는 이를 중간자라 칭한다. 즉, 에로스는 아름다운 것, 좋은 것, 지혜로운 것을 욕구하는 중간자인 것이다.
에로스의 욕구 대상인 아름다운 것, 좋은 것, 지혜로운 것은 진선미를 상징하며 이는 아름다움 자체, 좋음 자체, 지혜로움 자체를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또한 ‘~인 것 자체’라는 용어는 플라톤의 사유를 상징하는 원형 및 이상형과 직접적인 관련을 맺으며 이데아 그 자체를 가리킨다. 이데아는 생성되지도 소멸되지도 않으며 형이상학적 세계에서만 실현되는데 이는 다시 말해 ‘~인 것 자체’가 이데아와 동일한 성질을 내포함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에로스가 욕구하는 욕망의 대상은 이데아를 통해 부연설명 될 수 있다. 플라톤은 내각의 합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180 인 삼각형이 바로 이데아의 세계에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었다. 현실세계에는 완전한 상태의 삼각형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아름다움 자체, 좋음 자체, 지혜로움 자체란 현실 세계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곧 현실세계에서의 X에 대한 결핍을 뜻하며 이 결핍을 메우려는 욕망이야 말로 플라톤이 지향하는 욕망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욕망은 그 자체로 이데아를 상징하며 X의 지향점이 이데아에 있음을 나타낸다.
그렇다면 이데아는 어떻게 형상화되는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와 같은 질문에 대해 존재의 네 가지 원인이 되는 질료인, 형상인, 작용인, 목적인을 바탕으로 답하고 있으며 이들이 모두 존재에 선행한다고 말한다. 의자를 예로 들어보자, 질료인이란 의자의 재료로 쓰이는 나무를 뜻하고, 형상인은 설계도면과 같은 의자의 원형을 뜻하며 작용인은 의자를 제작하는 목수를 뜻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가장 중점을 두고 있는 목적인은 의자의 용도, 기능 역할을 의미하며 이는 곧 의자의 목적, 더 나아가 본질을 뜻한다. 이 중 형상인은 이데아와 그 의미를 같이하며 플라톤은 이데아가 구체적 사물 즉, 질료인 안에 들어가 있다고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이 주장하는 이데아의 선재성과 실체 및 본질론은 본질주의와 깊은 관련이 있다. 본질주의는 선 본질 후 존재적 존재관을 말한다. 이는 그 자체로 장단점을 모두 갖는데, 모든 것이 정해진 용도, 기능, 역할을 통해 설계된 것이라는 주장과 본질이 존재 이전부터 있어왔다는 말은 사람의 존재 이유에도 적용되어 개개인 모두에게 존재 이유와 의미를 부여한다. 이로써 사람들은 각자의 목적과 본질을 지닌 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역으로 본질이 이미 정해진 존재와 그 존재가 살아가는 이유는 본질에만 달려 있음을 의미하여 살아감에 있어 본질을 잃게 되면 그와 동시에 우리는 삶을 사는 목적, 더 나아가 존재 이유를 잃게 된다. 의자가 그의 본질인 ‘사람을 앉히는 것’이라는 목적 즉, 용도, 기능, 역할을 상실하면 버려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이처럼 본질의 선행으로부터 야기된 장점은 부메랑과 같이 곧 단점이 되어 돌아오기도 한다.
본질주위와 상반되는 입장인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즉, 실존주의는 인간 실존은 실존함이 먼저이고, 그 다음 스스로를 자신이 원하는 바대로 만들고 정의한다는 의미로 선 본질 후 존재적 존재관을 지지한다. 샤르트르는 인간을 존재가 아닌‘무’라고 말한다. ‘무’라는 것은 인간에게 미리 주어진 어떤 본질이 없다는 것을 뜻한다. 본질주의는 주어진 본질을 수행하여야만 나로서 존재하게 되는 반면 실존주의는 내가 하는 모든 것이 나의 본질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실존주의에서의 생의 모든 순간은 선택으로 가득 차있다. 이를 표현한 구절이 바로 ‘C between B and D’이다. C는 choice(선택)을, B는 birth(탄생)을, D는 death(죽음)을 의미하여 태어남과 죽음 사이의 실존함에는 결국 수많은 선택만이 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실존주의는 생전 세계 및 사후 세계를 일컫는 형이상학적 세계를 부정하게 된다.
수많은 선택은 동시에 샤르트르가 인간을 ‘대자’라는 개념으로 규정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대자와 즉자의 근본적인 차이는 의식의 유무에 있다. 즉자는 주체로서만 존재하여 의식과 자기의식이 결여되어 있는 반면 대자는 자기 자신과 대면하는 자아 즉, 객체를 통한 의식과 자유의식이 존재한다.
여기서 샤르트르가 말하는 ‘의식’은 기존의 의식에 관한 해설과는 다르다. 생각한다와 의식한다의 차이를 생각하면 이해가 쉬운데, ‘나는 의식한다 나를.’이라는 문장에서의 ‘나’는 주체와 분리된 새롭고 낯선 자아를 의미한다. 컴퓨터를 예로 들어 보면 ‘나는 생각한다 고장 난 컴퓨터를’는 컴퓨터가 고장 난 현재 상태만을 생각하는 것이다. 반대로 ‘나는 의식한다 고장 난 컴퓨터를’은 고장 난 컴퓨터가 아닌, 고장 난 컴퓨터에게는 없는, 고장 난 컴퓨터와는 다른 것을 떠올리는 과정이다. 이것을 자아의식에 적용시키면 위에서 말한 ‘나는 의식한다 나를’이라는 문장은 예시의 컴퓨터와 마찬가지로 ‘나’와는 다른, ‘나’에게는 없는, ‘나’가 아닌 것을 떠올리는 과정이다.
더 나아가, 대자는 사실성으로부터 벗어나 초월성을 갖게 된다. ‘나’가 아닌 것은 부정을, ‘나’에게 없는 것은 결함을, ‘나’와 다른 상태는 초월을 의미한다. 이는 의식의 지향성 및 무화작용 즉, ‘의식의 본성은 그것이 아닌 것일 수 있음이며 동시에 그것으로 있을 수 없음이다.’와 관련된다. 그것이 아닌 것은 무화작용의 일종으로 지금 현존하는 의식내용과 항상 지속적으로 불일치하고자 하는 대자 존재의 의식을 뜻하며 마찬가지로 그것으로 있을 수 없음은 의식의 지향성을 말하며 의식은 ‘현존하는 존재’가 아닌, ‘또 다른 무엇인가’를 향함을 뜻한다. 지향성은 고정 목적을 갖는 것이 아니라, 결핍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무화작용을 통해 항상 부정과 초월의 연속선상에 있으므로 의식은 항상 미정 상태이다. 이러한 미정 상태가 곧 자유로운 의식을 상징하는데, 이는 곧 실존의 ‘자유로움’을 대변한다.
한때는 즐겨 앉았던 의자도 시간이 지나면 싫증이 난다. 의자는 더 이상 우리로부터 사랑 받지 못하는 불행한 상태에 빠지게 되지만, 자유를 가진 타자의 경우 상황은 전혀 다르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관심이 줄어들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순간 언제든지 그 상황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실존주의를 통해 궁극적으로 인간 행위의 자유성을 토론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처럼 우리는 언제나 욕구하며, 에로스의 욕구대상인 이데아는 실존과 본질의 사이에 존재하는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향연』에서 플라톤이 궁극적으로 제시하는 에로스 즉, 선을 영원히 소유하기 위한 욕망은 그 대상이 영원하고 불변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동시에 대상이 지닌 속상 또한 불멸함을 나타낸다. 대상 그 자체가 지닌 본질의 실존에 대한 선후관계는 현대사회에서도 꾸준히 논의되고 있다. 따라서 플라톤이 주장하는 선에 대한 욕망, 에로스를 판단하는 기준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 우리는 서로의 지향관계에 있는 본질과 실존의 흐름 속에서 끊임없이 고찰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