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공모전

행사명
[공모전]제3회 북삼매 북리뷰공모전
행사일
2017-10-11 00:00 ~ 00:00
접수기간
2017-10-11 ~ 2017-11-10
행사장소
중앙도서관 홈페이지
신청인원/정원
2명 /99명
대상
학부 재학생

내용

 

 첨부 1. 2017년 북리뷰공모전신청서
        2. 다르마칼리지100서도서목록
        3. 븍리뷰샘플_2016년대상수상작

후기

최일우 2018-02-05 추천(1)
우수이미지 [전체부문 대상작]멋진 신세계
바이오환경과학과 3 조*우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는 과학의 기술이 발전된 세계를 그리고 있다. 헉슬리의 신세계는 모두가 행복하다. 굶주림과 실업, 가난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질병도 없고, 전쟁도 없으며, 어디서든 청결하고 위생적이다. 누구도 미래에 대해 불안함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것이 현실에서도 가능할까? 왜 멋진 신세계일까? 나는 이 책의 제목의 의미가 너무 궁금해졌다.





2012년, 야마나카 신야는 유도 만능줄기 세포(ISP)를 만들어낸 공로로 노벨상을 받았다. ISP를 간단하게 설명하면 당신의 손바닥에 있는 세포를 잘라 그것을 변형시켜 당신의 모든 조직으로 변형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간에 문제가 있다면 간을 형성하는 세포로 말이다. 이 실험은 쥐를 대상으로 성공했으며, 미래에 사람을 대상으로 성공한다면 우리는 소설과 비슷한 세계에 살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책의 주인공은 이러한 세계를 멋진 신세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존과 총통의 대화에서 이는 잘 나타난다. “위험 속에서 삶을 산다는 것에도 무슨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존은 신세계의 총통에게 이렇게 묻는다. 총통은 “여건을 안락하게 만들길 원하네”라고 말한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공포와 분노 같은 일은 전혀 없는 평화로운 세상. 이에 대한 존의 말이 정말 멋있다. 존은 총통에게 “하지만 저는 안락을 원치 않습니다. 저는 신을 원합니다. 시와 진정한 위험과 자유와 선을 원합니다. 저는 불편한 것을 좋아합니다. 저는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합니다.”라고 말한다.





나는 이 부분을 읽고, 이 소설의 세계가 얼마나 무서운지 깨달았다. 만약, 오랜 시간 동안 살아온 노인이 있다고 예를 들어보자, 과연 그는 행복할까? 그곳이 신세계일까? 노인은 고향, 가족, 좋았던 기억들은 가지고 있지만 기억에 대한 감정은 다 사라지고 마치 자기가 겪은 일이 아니라 책을 읽은 것처럼 느낄 것이다. 감정은 없고 기억에만 의존해 오랫동안 살아가는 이 노인을 살아 있는 사람이라고 말 할 수 있을까? 이렇게 살아가는 것은 가치가 있을까? 몸은 살아있지만, 감정은 없는 사람. 이것은 인형이 아닐까? 누군가에 의해 조작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인형’ 말이다. 존을 제외한 사람들의 삶은 멋진 신세계라는 의미와 너무나도 반대 되지 않는가?





이 소설의 주인공 존과 매우 비슷하게 주장한 철학자가 있다. 바로 루소다. 장 자크 루소는『에밀』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어린아이로서의 삶을 영위하는 일만 생각하는데,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어른이 되었을 때 자신의 삶을 영위하고, 운명의 시련을 견뎌 내고 유복함과 빈곤함을 문제삼지 않고, 아이슬란드의 얼음 속이나 말타 섬의 불덩이 같은 바위 위에서라도 살아갈 수 있도록 훈련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당신들은 아이가 죽을까 하여 걱정하며 조심해서 보살피는데, 그것은 헛수고이다. 아이는 언젠가 죽을 것이다. 그 아이에게 죽음을 피하는 것을 가르치기보다는 사는 것을 가르쳐라. 산다는 것은 호흡을 하는 것이 아니다. 활동하는 것이다. 우리의 기관과 감각과 능력을, 그리고 우리에게 존재감을 주는 몸의 모든 부분을 활용하는 것이다. 가장 잘 산 사람이란, 가장 오랜 세월을 산 사람이 아니라 인생을 가장 잘 체험한 사람이다.”



단순히 가능한 한 더 오래, 덜 위험하게 사는 길을 택하여 삶의 가치를 0에 수렴시키는 존재가 아니라, 최대한 오래 살아남기 위해 노력함과 동시에 나를 만족시키기 위해 수 많은 가능성을 체험하고, 더 훌륭하게, 더 만족스럽게 삶의 가치를 무한대에 수렴시키도록 노력하는 존재가 바로 ‘사람’이다. 이런 의미에서 소설 속에서 유일한 사람은 존이라고 할 수 있겠다.





존은 자신의 가능성을 다 시험해본다. 위의 총통과의 대화가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그는 유일하게 ‘혼돈’을 느낀다. 그는 문명국에서 인형처럼 살아 갈 것인가, 아니면 야만인으로 돌아갈 것인가, 이렇게 그의 정체성은 굉장히 위태로운 경계선에 서 있다. 안타깝게도, 아슬아슬한 줄타기 끝에 그는 자살을 하고 만다. 멋진 신세계는 결국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하지만 헉슬리가 지금 이 시대에 소설을 썼다면 이렇게 비극적이지 않았을 것 같다. 왜냐하면 현대는 존처럼 수 많은 좌절을 겪고, 문학을 읽고, 예술을 하며, 위험을 감수하는 사람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이는 제레미 러프킨의 책 「소유의 종말」에 잘 나타난다. “상품의 소비는 이제 거의 한계점에 이르렀다. 한 집에 차가 두세 대 있고 텔레비전이 대여섯 대씩 있고 온갖 필요와 욕구를 만족시키는 가전제품이 완비되어 있을 때 상품이나 서비스에 대한 새삼스러운 욕구가 생겨나기는 어렵다. 바로 이 지점에서 자본주의는 완전한 문화적 자본주의를 향한 최후의 변신을 시도한다. 문화적 생활을 상징하는 기호, 그 기호를 해석하는 예술적 의사소통의 형식만 우려먹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체험 그 자체를 우려먹는 것이다.” 책 내용의 일부분인데 간단하게 설명하면, 우리는 휴대폰을 사는 것이 아니라, 스티브 잡스의 애플을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쉽다. 이제 우리들은 사람들의 이야기, 아이디어를 소비하고 있다.





테슬라 모터스의 CEO인 앨론 머스크가 화성 이주 계획인 ‘스페이스X 프로젝트’를 시작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앨론 머스크를 소설 속의 존처럼 미쳤다고 취급했다. 하지만 결과는 어떤가? 이 프로젝트는 앨론 머스크에게 엄청난 명예와 부를 안겨주었고, 21세기의 가장 중요한 사업이 되었다. 정말로 멋진 신세계가 열린 것이다. 또한 트위터, 인스타그램, 우버, 킥스타터를 비롯해 수 많은 기업에 투자했던 크리스 사카는 미네소타 대학교의 졸업식에서 독특하고 별나게 살아가라고 말했다. 존을 제외한 사람이 포드를 찬양하는 것과 달리, 존처럼 셰익스피어와 같은 문학을 읽으며, 별나게 살아가라고 말한다. 이렇게 현대에 큰 성공을 거둔 사람들이 존처럼 사는 것이 성공의 열쇠라고 말하고 있다.





헉슬리의 존이라는 인물을 통해 과학기술의 진보, 기계문명의 발달이 인간적 비극을 낳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는지 모른다, 즉 멋진 신세계라는 제목과 존의 비극적인 삶을 대비하여 ‘멋진 신세계는 없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나만의 방식으로 해석하고 싶다. 현대는 존처럼 자신의 정체성에 고민하고, 위험을 감수하고, 남들에게 비웃음거리가 되는 사람이 멋진 신세계를 열고 있다. 나는 이 소설의 결말을 고치고 싶다. 존은 총통과 싸우며, 그 세계를 벗어나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었고, 수 많은 사람들이 문학, 음악과 같은 예술을 향유했고, 그를 바탕으로 다양한 생각을 공유하여 정말 멋진 신세계를 만들었다고 말이다. 분명히, 멋진 신세계는 존재한다. 그러니 ‘인형’처럼 살지 말고, ‘사람’처럼 살아라.




 
최일우 2018-02-05 추천(0)
[문화와예술부문 최우수작]위대한캐츠비
신문방송학과 4 이*주







고대 크레타 섬에는 당대 최고의 건축가인 다이달로스가 지은 미궁 ‘라비린토스’가 있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다이달로스는 아들 이카로스와 함께 자기 작품에 갇히는 신세가 됐다. 비상한 두뇌의 소유자인 다이달로스는 미궁에서 탈출할 수 있는 기막힌 꾀를 내놓는다. 바로 깃털과 밀랍으로 만든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날아 도망치는 것. 인류 최초로 하늘을 날게 된 어린 아들은 흥분했다. 아버지의 거센 만류를 무시하고 얼마나 태양에 가까이 갈 수 있나 시험이라도 하듯 하늘 높이 치솟았다. 태양열이 서서히 밀랍을 녹였고, 이를 까맣게 모르고 있던 이카로스는 아득한 상공에서 갑자기 곤두박질치며 최후를 맞이한다.





수천 년 뒤인 1920년대 초, 유례없는 비극인 1차 대전이 끝나고 신생강국 미국은 사상 최고 호황을 맞이한다. 금주법과 재즈로 상징되는 풍요롭고 사치스런 시대이자, 배금주의와 속물근성이 득세하고 도덕적 타락과 빈부격차가 만연한 시대였다. 이때 반드시 거대한 성공을 거두겠다는 야망을 가진 무일푼의 청년이 있었다. 청년은 피나는 노력으로 자기계발에 전념했다. 성공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도 가리지 않았다. 야망을 원동력으로 끊임없이 달려오던 그는 자신보다 아득히 높은 상류층 여성을 사랑하게 된다. 이 사랑은 마치 이카로스와 태양의 관계 같다. 그녀는 청년이 결코 손에 쥘 수 없는 존재였다. 청년은 계급의 벽을 넘지 못하고 사랑에 실패한다. 그가 애써 이루어 놓은 야망도 산산조각 나고 급기야는 모함에 휩싸여 허무하게 목숨을 잃는다. 



이카로스의 숙명, ‘자신의 한계를 초월한 상승’을 꿈꾸는 청년이 바로 주인공인 ‘위대한’ 개츠비다. 이 개츠비라는 인물의 몰락은 바로 ‘아메리칸 드림’이 좌절되고 변질된 현실을 은유한다. ‘위대한 개츠비’는 ‘호레이쇼 엘저 스토리’를 위시한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미국인들이 가진 마스터 플롯에 대한 신랄한 비판의식을 담고 있는 것이다.





현재는 영문학 최고 명작 반열에 오른 ‘위대한 개츠비’이지만 출간 당시엔 지금과는 거리가 먼 대접을 받았다. 작가 피츠제럴드 본인도 자신의 최고 역작이라고 자부하고, 문단에서도 큰 찬사를 받았지만 대중에게 인기를 끌지 못했다. 작품이 출간된 1925년, 미국인들은 부와 쾌락을 만끽하는 시간이 영원할거라고 믿었을지 모른다. 시대의 치부를 꼬집는 ‘위대한 개츠비’는 불편하게 느껴졌으리라.





‘위대한 개츠비’가 그 가치를 인정받고 지금의 위치에 오른 것은 미국인들이 ‘대공황’과 ‘세계 2차 대전’이라는 두 개의 참혹한 비극을 겪고 나서였다. 현실이 결코 낭만적이고 순조롭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된 것이다. ‘아메리칸 드림’으로 포장되는 온갖 욕망과 행위들이 결국은 허상이고, 거대한 사회구조가 자본주의 현실을 지배했다. 이것이 현실이었고, 이를 잘 반영한 것이 작중 데이지가 내린 선택이다. 데이지는 자신을 열렬히 사랑하는 개츠비 대신 남편 톰을 택했다. 톰은 당시 지배층을 대변하는 인물로, 남성우월주의와 백인우월주의에 사로잡혔지만 부와 권위를 가진 뼈대 있는 집안 출신이다. 톰은 데이지를 업신여기고 외도를 일삼는다. 데이지는 그걸 알면서도 톰을 택한다. 개츠비의 부는 밀주를 비롯한 온갖 범죄로 인해 얻은 것이기 때문이다. 돈이 많다한들 그 부의 근원이 천하기 때문에, 데이지와 개츠비는 근본부터 다른 계급이기 때문에 둘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던 것이다. 



세상은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인간성을 잃은 톰보다, 이상과 꿈을 지키려 했던 개츠비를 더 ‘부도덕’하고 ‘열등’한 인물로 여겼다. 단지 범법적인 행위로 돈을 벌었다는 이유 때문이다. 개츠비 생전에 곁에서 알랑대던 이들 중 누구 하나도 장례식에 나타나지 않았다. 심지어 데이지마저도. 이는 곧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결코 기득권과 대등한 위치에 오를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현실의 인간관계의 근본은 속물근성과 계산적인 이해타산에 불과하다는 것도 일깨워준다. 화자인 닉이 개츠비를 향해 외친 “너는 그 빌어먹을 인간들 다 합친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인간이야.”라는 외마디 고함이 비로소 미국인들을 달콤한 환상에서 깨어나게 만들었다. 냉혹하고 무자비한 자본주의의 현실을 직시한 미국인들은 개츠비를 신생강국 미국과 신흥부자세력 그리고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며 이 작품을 해석했다.





​ ‘위대한 개츠비’는 실상 따지고 보면 이역만리 미국인들의 이야기를 담은, 그것도 무려 90년 전을 배경으로 삼은 작품이다. 그런데도 현대 우리나라에서도 명작으로 취급받고 널리 읽히고 있다. 단순히 영문학 최고봉이라는 칭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일까? 아니다. 바로 지금을 살고 있는 한국인들과 ‘위대한 개츠비’ 사이에 시대와 국적을 초월한 공감대가 형성됐기 때문이다.





한국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이라는 비극의 근현대사를 거치고 무엇 하나 온전히 가진 것 없이 시작했다. 이윽고 쿠데타로 집권한 군부 주도에서 고속경제성장을 이룩했다. 이때 맨손으로 시작해서 자수성가를 이루는 ‘성공신화’가 많이 탄생했다. 성공신화의 주역처럼 되길 꿈꾸는 이들이 지방에서 서울로, 농촌에서 도시로 무작정 상경했다. 이들 모두가 ‘상승’을 꿈꾸는 ‘이카로스’의 후예이자 ‘개츠비’의 분신이었다. 이윽고 경제성장 덕분에 금세 부를 움켜쥔 한국인들은 가난으로 인한 그간의 설움을 씻어내려는 듯 소비와 오락에 빠졌다. 대공황 직전의 1920년대 미국인들처럼 한국인들은 호황을 등에 업고 호화와 사치를 누렸다. 이윽고 닥쳐온 IMF 외환위기를 겪고 한국인들 역시 일장춘몽에서 깨어났다.





수십 년 전 ‘선배’ 미국인들이 그랬듯이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과 양면성을 깨닫게 되었다. 많은 이들이 순식간에 모든 것을 잃고 주저앉았다. 부익부 빈익빈의 양극화가 심해졌고, 사회 깊숙이 자리 잡은 계급구조는 공고해졌다. 개인의 노력을 통해서 계급상승을 이루는 시대는 사실상 존재치 않게 됐다. 자수성가의 허상은 자취를 감췄다. 속물근성만이 잔재로 남아 한국사회에 만연했다. 이를 조소하는 ‘헬조선’과 ‘금수저’ 담론이 생겨나고 힘을 얻었다.





​ 이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에는 아직 자수성가와 부귀영화의 야망을 품은 ‘개츠비’들이 존재한다. 이들이라고 경직된 사회구조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냉정한 현실을 인지했지만 희망과 꿈을 쉽게 포기하지는 않을 뿐이다. 바로 누구보다 바쁘게 살고 있는 이 시대 청년들이다. 88만원 세대라고 불리며 단군 이래 최대의 취업난에 시달리는, 물질 앞에 숙연해지고 초라해지는 대다수의 젊은이들. ‘개츠비’는 이들에게 복잡한 자화상이다. 그가 보이는 강렬한 야망과 사랑, 그리고 자격지심과 좌절. 이 두 가지 감정이 청년들 속에서 항상 교차한다. 청년들은 자신은 개츠비와는 다르게 성공하고도 행복하게 살겠노라는 다짐과 기대를 품기도 하고, 개츠비와 그들 스스로를 향한 연민과 동정에 북받치기도 한다. 무엇이 됐든 개츠비와 자신을 동일시하게 된다는 점에서 같다.





​ 개츠비가 밤마다 데이지가 사는 저택의 초록 불빛을 보고 손을 뻗는 것처럼, 이카로스가 태양을 향해 높이 날아오르는 것처럼 우리 청년들은 ‘상승’을 꿈꾼다. 부와 명예를 비롯한 성공을 거두고, 행복해지길 원한다. 그러나 정작 이를 이루기 위한 우리의 행위가 종국엔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또한 성공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한다. 무엇이 성공이고 행복인지조차 확실히 정의내리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끊임없이 흔들린다.  





이 혼란 속에서 우리가 개츠비와 이카로스의 숙명을 그대로 따를 필요는 없다. 오히려 개츠비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 숙명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한다. 데이지는 개츠비의 인생의 목표이자 사르트르가 말하는 ‘즉자’에 해당하는데, 결국 이 데이지의 존재로 인해 개츠비는 자기 자신을 잃고 평생 동안 실체가 아닌 환상에 의한 사랑만을 좇게 된다. 이 작품의 의의 역시 단순히 개츠비와 공감을 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위대한 개츠비’에서 나타나는 인생의 부조리, 현실 고발을 통해 자기 자신 스스로를 돌이켜 봐야한다. 





개츠비에게 있어 데이지가 그렇고, 이카로스에게 있어 태양이 그렇듯이, 빛이 나고 찬란한 존재를 손에 쥐는 게 성공의 조건은 아니다. 만인이 동경하는 존재를 쟁취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행여 이를 손에 얻는다 한들 반드시 우리 개개인의 삶에 행복을 가져다주진 않는다는 걸 깨달아야 한다. 결국 이것들은 모두 허상에 불과하다. 결코 얻을 수 없는 것이라면 과감히 포기하고 자기 자신만의 독자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게 옳다. 이카로스와 개츠비를 닮을 수는 있지만, 반드시 그들의 전철을 밟을 필요는 없다. 그들을 초월해야 한다. 사회가 만들어낸 허상에서 벗어나서 진정한 자기 자신을 알아가고, 사랑하기 위해 집중하는 것. 그것이 바로 ‘위대한 개츠비’ 감상의 궁극적인 목표가 아닐까.


 
최일우 2018-02-05 추천(0)
[문화와예술부문 우수작]오이디푸스왕
교육학과 4 정*오

 






아리스토텔레스는 “『오이디푸스 왕』은 발견과 급전을 가진 가장 완전한 비극의 전범이며, 호머의 서사시보다 훨씬 우월하다”고 평가했다. 소포클레스의 작품 중 하나인 『오이디푸스 왕』을 극찬한 것이다. 실제로 『오이디푸스 왕』을 읽는 동안, 극적으로 흘러가는 내용으로 인해 긴장감을 느낄 수 있다. 계속해서 다음 내용을 유추하게 만들었고 궁금증을 유도한다. 또한 ‘오이디푸스 왕’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여러 아이러니적인 요소를 보며 의문을 품게 된다. 운명 속에서 살고 있지만, 그 속에서조차 한 인간으로서 자신이 선택하는 자유의지를 중요시 했다는 점은 굉장히 아이러니하다.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결말에 오이디푸스가 결국 자기 자신의 눈을 스스로 찌르는 장면이다. 오이디푸스 왕은 스스로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눈을 찌르며 그 곳을 떠나는 비극으로 막이 내린다. 이 결말은 과연 그가 신이 내려준 운명에 대해 순응한 것일까 혹은 저항한 것일까? 스스로 눈을 찌른 것은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소설 속 오이디푸스의 일생은 자신이 태어나기 전에 받았던 신탁대로 흘러가고 있다. 아버지인 라이오스가 그를 버려도, 또 그가 아무리 저항하기 위해 코린토스에서 테바이로 도망을 쳐도, 그는 자신도 모르는 새에 그는 신탁을 따라가고 있던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오이디푸스가 눈을 찌른 것을 살펴보면 테이레시아스의 대사에 주목해야 한다.





“그는 눈 뜬 자에서 장님이 되고, 부자에서 거지가 되어 이국 땅을 향해 지팡이로 앞을 더듬으며 가게 될 것이오. 또 그는 자기 자식들의 형제이자 아버지로서 함께 살고 있으며, 자신을 낳은 여인의 아들이자 남편이고, 자기 아버지와 함께 씨 뿌린 자이자 그의 살해자임이 드러날 것이오.” (455-460행)





테이레시아스는 오이디푸스가 장님이 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오이디푸스가 눈을 찌른 것이 신탁에 의한 것인지 알아보기 위해선 이러한 대사를 내뱉게 된 배경을 살펴보아야 한다. 테이레시아스가 말하는 ‘장님’이라는 것이 실제로 두 눈을 찔러 물리적으로 두 눈이 먼다는 것인지, 혹은 오이디푸스가 범인이 자신이라는 것을 모르기에 바보 같음을 비유하는 의미에서 눈이 멀었다고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한데 그대가 내 눈 먼 것을 비난하였으니, 선언하겠소. 그대는 앞을 보면서도, 자신이 어떤 악 속에 있는지, 어디에 살고 있는지, 어떤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는지 보지 못하고 있소.” (410행)





위의 테이레시아스의 대사를 보더라도, 물리적으로 두 눈이 멀었다는 것을 의미하기 보다는 ‘오이디푸스가 범인이 자신이라는 것을 모르기에 바보 같음을 비유하는 의미에서 눈이 멀었다고 하는 것’에 더 가까움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눈을 찌른 것이 테이레시아스의 예언에서 비롯된 신의 뜻이라고 보기엔 어렵다고 생각한다.





또한 오이디푸스의 지난 일생을 살펴보면, 코린토스에서 살던 시절, 그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관계를 맺을 것이라는 신탁에서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 코린토스에서의 추방을 ‘선택’한다. 이처럼 오이디푸스는 운명 앞에서 파멸하는 인간의 한계를 가지고 있지만 스스로를 추방시킬 만큼 자신의 이성과 자유의지를 포기하지 않는다. 이렇게 오이디푸스가 한 인간으로서의 자유의지를 믿었다는 점을 본다면, 눈을 스스로 찌른 것은 오히려 신에 대한 저항이라고 해석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가 눈을 찌르는 장면을 목격한 전령의 대사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자신의 둥근 눈알을 찔렀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그 눈들은 그가 당한 것이든, 행한 것이든, 끔찍한 것을 보지 말라고,” (1270-1275행)





오이디푸스는 자기 자신에게 신탁에 의해 자신이 당한 것이나 행한 것 모두를 보지 말라고 소리친다. 이는 ‘스스로 눈을 찌른 것’이 ‘신탁에 의해 자신이 해왔던 것들을 보지 못한 눈을 만들기 위해 한 행동’으로 해석할 수 있다. 즉 신의 뜻대로 행동했던 것을 보지 않은 것으로 치부하려 하는 것을 보면, 눈을 찌른 행위는 신에 대한 저항이라고 생각된다.





사실 그가 눈을 찌른 것이 아니라 ‘눈의 관절’을 찔렀다는 점에서도 이는 신에 대한 저항으로 해석된다. 오이디푸스는 어렸을 적, 불길한 신탁으로 인해 아버지에게 발목의 관절이 뚫린 채로 버려진다. 이렇게 관절을 찌르는 행위는 그의 아버지가 신탁에 저항하여 자신의 아들을 죽이기 위함이었다. 오이디푸스 역시 눈의 ‘관절’을 찔렀다는 것은 자신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신의 신탁에 저항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따라서 눈을 찌른 행위는 테이레시아스의 예언에서 비롯된 신에 대한 순응이 아닌, ‘신에 대한 저항’이자 ‘자신의 자유의지로 행한 선택’으로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그가 지혜를 얻고, 부조리한 신탁에 의한 자신의 과오를 인식하는 순간인 것이다.

『오이디푸스 왕』과 같이 그리스 시대의 많은 작가들이 운명 앞에 파멸하는 인간을 주제로 ‘비극’을 써내려 갔다. 비극은 “인간의 마음 속에 생기는, 자신의 동료나 또는 피할 수 없는 운명과의 갈등의 결과로 생기는 인간의 고통과 불행을 취급하는” 연극의 한 종류로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소설이나 극을 접한 독자들은 자신이 한동안 감정이입을 해서 지켜본 주인공이 불행한 결말을 맞이하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또한 비극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선호하는 권선징악 이라는 일반적인 통념에 반하는 것이기 때문에 슬픔을 자아낼 수 있다. 그렇다면 소포클레스를 비롯한 작가들은 어째서 극 속 인물의 불행한 마지막을 보여주는 것일까?





특히나 오이디푸스의 결말은 그 스스로 자신의 두 눈을 자신의 아내이자 어머니의 브로치를 이용하여 찔렀기 때문에 더욱 참혹하다고 할 수 있다. 한 나라의 왕으로 고귀하고 위엄 있던 존재였으나 운명에 휩쓸려 가장 비참한 존재로 전락해버렸다. 이렇게 커다란 격차를 보이는 오이디푸스의 아이러니적 면모는 그의 비극적 결말을 통해 더욱 극대화 될 수 있었다.





또한 그는 운명 앞에서도 인간의 자유의지를 포기하지 않는다. 이러한 그의 운명에 순응하지 않고 스스로 선택하고 개척해나가려는 태도에서 이 소설이 비극으로 끝마쳐지는 이유가 설명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빌려오자면, 그는 ‘비극’을 두고 이렇게 설명한다. “비극은 어느 정도 위대한 인물의 선하고 그 자체로 완결된 행위를 매력적인 형태의 언어로 모방한다. 이때 각각의 장면에서 형상화하는 수단은 각각 다르게 적용될 수 있다. 보고가 아니라 행위자에 의한 모방으로 연민과 공포를 일으키고, 이를 통해서 흥분 상태의 정화를 야기한다.” 오이디푸스 왕의 그 자체로 완결된 선한 행위인 눈을 찌르는 것이 비극을 통하여 더욱 매력적으로 읽어질 수 있기 때문에 비극적 결말이 필요했다. 또한 비극은 오이디푸스 왕이 스스로 선택한 주체적인 의지였기 때문에 독자들의 흥분 상태를 정화시킬 수 있으며, 그것은 비극적 결말과 잘 어우러진다.





오이디푸스는 아이러니적이며, 극의 끝에 도달해서는 자유의지에 따라 기존체제를 거부하여 비극을 맞이한 인물이다. 다시 말해, 그는 운명 앞에서 파멸하였지만 그것은 그의 자유의지와 선택에 의한 것이며, 비록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했지만 그의 선택이기에 우리에게 오히려 카타르시스를 불러온다.





『오이디푸스 왕』의 ‘정해진 사회 시스템 속에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표출해내는 주인공의 면모’는 ‘비극’ 속에서 더욱 빛을 보였다. 비록 그가 지니고 태어난 신탁에 의한 삶을 살았으며, 떠나면서까지 신탁 의존적 사회를 더욱 공고히 만들었을지라도, 그의 자유의지를 드러낸 면모 자체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며 그것은 우리가 『오이디푸스 왕』을 읽어야 하는 이유로 충분하다.






 


 

최일우 2018-02-05 추천(0)
[문화와예술부문 우수작]세일즈맨의 죽음
행정학과 2 강*나







1949년 미국 작가 아서 밀러에게 영광의 퓰리처상을 안겨준 작품은 바로 세일즈맨의 죽음이다. 대공황 시기의 한 가정사를 담은 희곡 형태의 문학작품으로서 총 2막과 레퀴엠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대를 초월하여 오늘날까지도 다양한 형태의 무대가 이 희곡을 바탕으로 제작되고 있을 정도로 작품성이 뛰어나다.





주요 등장인물로서 아버지 윌리, 어머니 린다, 큰 아들 비프, 작은 아들 해피가 한 가정을 이루는데 이야기의 주축이 되는 것은 아버지의 해고와 아버지와 아들의 굴곡진 갈등이다. 이 문제들은 개인의 성격적 결함으로만 발생하는 것뿐만 아니라 당시 대공황이라는 시대상황과 맞물려 극대화된다.





여러 무대 장치들은 주제를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우선 1막은 고요한 플루트의 선율로 시작된다. 여러 악기들은 극적 감정을 심화시키거나 특유의 분위기를 조성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예를 들어 플루트는 가장 많이 사용되는 악기로 아버지의 기억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또한 무대 조명도 과거의 행복한 추억을 나타낼 땐 초록색, 불안정한 삶을 그릴 때 빨간색을 사용하는 등 등장인물의 심리나 상황을 드러낸다.





그리고 이 작품은 회상의 성격이 짙은 작품이다. 시간의 역행적 혹은 순행적 흐름을 드러내기 위해 관객과 암묵적 약속을 한다. 현재인 경우 왼쪽 문을 통해 집에 들어가며 가상의 벽을 철저히 지킨다. 반면 과거인 경우 가상의 벽은 허물어지며 그 자리를 통과해 무대 앞으로 나온다. 관객들은 이 과정에서 시간적 변화를 인지하게 되고 이내 익숙해진다. 이 시도는 당시의 파격적이었으며 희곡의 역사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





1막에서는 대공황의 여파로 인한 비극의 알이 부화한다. 비극이 가시적으로 드러난다. 윌리는 대공황 이전에 세일즈맨이었으며 물질적 여건도 부족하지 않았다. 고등학생인 아들 비프는 미식축구 선수 유망주로서 아버지의 희망이었다. 그러나 대공황이 시작되면서 윌리의 세일즈맨의 삶은 하락세를 타기 시작한다.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로부터 무관심을 받으며 커미션만 받는 신세가 되었다. 그리고 슬리퍼 신는 걸 잊어버린다든지 의도적으로 난간을 들이받아 자살 시도를 하는 등 이상 행동을 보이기 시작한다. 이는 현실과 이상과의 괴리감과 그에 따른 상실감에 기인하는 행동이라 생각한다. 그러므로 현실을 부정하고 도피하려는 것이다.





윌리는 다이아몬드로 떼돈을 번 자신의 형 벤과 성공한 세일즈맨을 존경한다. 윌리가 추구하는 가치관은 물적 풍요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가치관을 아들에게 투영하고 물질적 성공을 기대하고 요구한다. 하지만 비프는 목장 일을 하는데 수입이 적으며 해피는 판매 영업에서 보조적이고 복종적인 역할만 하고 있다. 둘 다 물질적 풍요와는 거리가 먼 상황이다. 윌리의 꿈이 좌절되는 순간이다.





아내 린다는 윌리에 관한 애정을 일관적으로 보여준다. 예를 들어 윌리를 위해 치즈를 냉장고에 준비해 놓는 등의 정성을 보인다. 그러나 윌리는 고마움을 표현하기보다 자신의 취향에 맞지 않다고 아내 린다에게 불평한다. 또한 린다의 말을 고압적으로 끊는 장면도 종종 등장한다. 이는 대공황 시절의 가부장적 사회의 현실을 반영한 것이지만 나아가 작가가 그런 현실에 대한 비판 의식을 담았다고 생각한다.





린다는 남편이 자살을 시도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자존심을 지켜주기 위해 남편에게 침묵하고 아들에게 말한다. 아들과의 관계 악화가 문제라고 생각해 부자 간 갈등을 완화하기 위해 노력하는 인물이다. 이것에 대한 결과로 아버지의 자살 시도 도구를 숨기는 비프와 자신의 직장과 아들의 미래에 대한 희망을 밝히는 윌리가 대조되며 1막이 끝난다. 이것 역시 이상과 현실을 효과적으로 대비시키는 것이다.





2막은 경쾌한 음악이 울려 펴지며 여유로운 주말로 시작한다. 하지만 분위기와는 모순적으로 2막에서 문제들이 심화되어 소용돌이치기 시작하고 하락세의 정점을 찍는다. 윌리는 더 나은 근로조건을 위해 사장 하워드를 찾아갔다. 하워드의 아버지와 각별한 사이었고 하워드란 이름을 지워준 사람이 장본인이라는 점은 윌리로 하여금 일말의 의심 없이 자신의 부탁을 들어줄 것이라고 생각하게 한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해고였다. 대공황의 불경기는 구조조정을 야기했고 윌리 개인은 실직했다.





윌리는 친구 찰리가 제안한 일자리를 거부한다. 이는 윌리의 센 자존심으로 볼 수도 있지만 자신의 위상이 낮아진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것이다. 또한 윌리는 외모와 인맥 등 외적인 것에 치중한다. 찰리는 그런 윌리에게 세일즈맨이 정작 중요한 것을 모른다고 나무란다.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부차적인 것을 중시하는 윌리 개인의 모순된 모습을 볼 수 있다.





부자 간 갈등 역시 고조된다. 아들 비프가 미식축구 유망주였음은 집 안에 배치된 은색 트로피로 부각된다. 윌리는 아들을 응원했고 비프도 윌리를 가장 존경했다. 하지만 비프가 윌리의 외도를 목격했을 때 갈등이 시작됐다. 비프가 아버지의 결점을 발견한 순간이었다. 존경의 감정은 실망과 분노의 감정으로 전환되고 아버지와의 거리감이 생겼다. 비프는 희망했던 대학 이름이 쓰인 운동화를 버리는데 이 장면은 표면적으로는 미식축구와의 단절이만 그 내면에는 아버지와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지만 윌리는 이를 방관한다. 침묵은 오해를 야기하기 마련이고 감정의 골은 격화되고 만다.





더욱이 1막에서 드러난 비프의 아들에 대한 물질적 성공에 관한 집착이 2막에서 심화되어 현실 도피와 자기기만의 상황까지 온다. 아들의 직장을 왜곡해서 높은 지위로 인식하고 사장 하워드에게 아들의 직장을 허황되게 말하는 등 현실을 인식하지 못한다. 친구 아들 버나드와 자신의 아들을 비교하기도 하고 아들에게 지속적으로 성공할 것을 요구를 한다.





이러한 집착은 오히려 아들과의 감정적인 교류 관계마저 단절하는 부작용을 가져온다. 비프는 윌리가 자신을 항상 비웃는다고 생각하며 아버지를 불완전한 존재로 인식한다. 그리고 해피 역시 허영심이 내재된 인물로 성장하게 된다. 자신의 직업을 과장되게 언급하는가 하면 술집에서 여성과 어울리며 아버지를 혼자 두고 그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소개한다. 낮은 자존감이 허영심을 더욱 부추긴 것이다. 살이 빠지지 않았냐고 여러 번 물어보지만 윌리는 무관심으로 일관한다. 아버지의 관심은 직업적 성공에만 집중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부자 갈등에 해소의 길이 열린다. 비프에 대한 진심을 들으며 윌리는 환하게 기뻐한다. 아들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고 좋아하는 부성애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보험금을 남기기 위해 자동차를 폭주시켜 자살로 생을 마감하며 2막이 끝난다. 아들에게 완벽한 아버지가 되어주진 못했어도 그 마음만큼은 진정성이 있었던 것이다. 가족에 대한 사랑과 책임감을 드러내는 대목인 동시에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선사한 대목이기도 하다.





레퀴엠에서 윌리의 장례식 장면이 등장하는데 가족 이외에 거의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다. 과거 윌리가 자신의 인맥을 과시하던 장면과 대조적이며 윌리의 허영심과 동시에 인생에 대한 허무함을 느낄 수 있다. 비프는 윌리에 대해 좋았던 추억을 회상하면서도 윌리가 허황된 꿈을 꿨고 자기 자신에 대해 알지 못했다고 반복한다. 부자 갈등은 완벽하게 해소된 건 아니라는 점이 암시된다. 하지만 이에 대해 찰리는 윌리의 삶을 비난할 수 없다며 세일즈맨은 꿈을 꾸는 사람이라고 한다. 비단 윌리의 잘못만은 아님을 작가가 암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린다의 슬픈 독백으로 암울하게 막을 내린다.





물질적 성공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떻게 보면 당연시 되는 가치관이다. 살아가겠다고 몸부림치는 윌리에게 대공황은 현실적인 꿈을 허황된 꿈으로 바꾸었다. 청춘들에게 구직을 허락하지 않으며 대공황으로 인한 경제적 불안정은 윌리로 하여금 물질적 성공에 더욱 집착하게 만들었고 부자 간 갈등도 고취시켰다. 하지만 작가는 외도라는 비도덕적인 행동과 지나친 물욕을 가진 윌리 개인의 결점이 불행의 또다른 원인이 될 수 있다는 비판의 여지도 남기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이 이상이 되게 하고 그 사이에 생기는 괴리감이 심화됐던 것은 대공황의 영향이 지대했다. 이 작품은 시대상황과 개인사를 적절하게 조화시키고 그 비극을 과감하게 드러내는 작품이다.






 
최일우 2018-02-05 추천(0)
[자연과기술부문 최우수작]침묵의봄
화학과 2 유*원





내가 『침묵의 봄』을 보고 느낀 것은 화학 물질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다. 『침묵의 봄』을 보고 비판적으로 물질을 보는 사람들이 증가함과 동시에 화학을 혐오하는 사람이 늘어난다는 것이 두렵다. 화학 물질의 본질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으며, 우리가 만든 봄의 침묵을 깨기 위해 우리가 어떠한 생각을 가져야 하고, 어떠한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지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침묵의 봄』 저자 레이첼 카슨은 1945년, 새로운 합성 화학물질인 DDT와 다른 제초제가 환경을 오염시킨다는 증거를 세상에 알렸다. 1957년, 그녀는 앞으로 화학물질들이 지구 생태계 전체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거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이 책은 이를 증명하기 위해 씌어진 책이다. 레이첼 카슨은 3장에서 본격적으로 살충제로써 쓰인 DDT(dichloro-diphenyl-trichloro-etane)에 대한 얘기를 시작한다. 당시 DDT는 무해하다고 여겨졌다. 많은 사람들이 여러 용도로 사용함에도 -심지에 몸에 직접 분사하여도- 즉각적으로 부작용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해가 없는 것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하지만 레이첼 카슨은 DDT는 지방 성분에 녹으면 상당한 독성을 발휘하고, 이는 아주 적은 양부터 시작해 점점 체내에 축적됨을 알게 되었다.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화학물질 남용이 궁극적으로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아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3장에서 6장에 거쳐, 그녀는 DDT를 비롯한 염화수소계열 살충제가 인간을 비롯한 생물 및 생태계에 심각한 위험을 초래함과 그것들은 자연적으로 분해되어 사라지지 않고 계속 자연에 남아 순환하여 공존함을 알리고 있다. 그리고 7장에서 9장에 거쳐, 살충제가 어떻게 남용되었는지와 살충제 사용이 야기한 생태계 파괴 등의 환경문제를 사례를 들어 자세히 알리었다. 한 예로, 느릅나무병의 매개체 역할을 했던 딱정벌레를 박멸하기 위해 살포한 살충제로 새는 더 이상 노래하지 않는 침묵의 봄이 찾아왔다. 그 살충제는 나무에 남아, 지렁이의 몸 속에 남아, 울새는 지렁이를, 정확하게 말하자면 지렁이와 살충제를 먹으면서 죽어나가며 봄에 지저귀는 새는 줄어들었다. 생태계는 독립적인 것이 아니기에, 무엇보다도 복잡하고 얼기설기 엉켜 있는 그물과도 같다.





나는 이러한 이야기 속에서 예전에 읽었던 책『원은 닫혀야 한다』의 저자 Barry Commoner의 주장, 생태계의 완전한 원을 이루는 순환 고리 안에서 빠져 나옴으로써 생태계를 파괴한 우리가 다시금 그 원을 닫히게 해야 한다는 주장이 생각났다. 우리 인간은 살충제라는 인공적인 화합물을 자연으로 누출함으로써 생태계의 순환 고리를 끊어 회복할 수 없는 상태로 만들었다. 하지만 그 고리는 다시 연결되어야만 하며 그 숙제는 고스란히 다시 인간에게 남게 된다. 레이첼 카슨은 12장에서 인간이 자연의 고리를 부수고 사용한 살충제가 인간의 신경계에 영향을 미침을 알리며 계속해서 이러한 화학물질을 사용한다면 그 대가는 우리가 치러야 함을 주장한다.





책이 발간된지 50년이 지난 지금에도 저자가 말하는 ‘침묵의 봄’은 계속되고 있다. 2017년인 올해만 이른바 ‘계란 살충제 사건, 생리대 사건’이 공론화 되었으며, 이슈화 되지 않은 수많은 화학 합성 물질 관련 사건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침묵의 봄』이 발간된 50년이 지난 지금, 과학자와 기업은 충분히 어떠한 기능을 하는 그 화학 합성 물질을 대체할 무해하거나 친환경적인 물질을 보다 많이 연구하며 만들어낼 수 있지만, 그들 당장의 이익을 위한 것은 비판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내가 이러한 또 다른 ‘침묵의 봄’을 만드는 사건과 책『침묵의 봄』을 보고 느낀 것은 인간에게 해를 입히는 화학 합성 물질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다. 더욱 무서운 것은 점점 우리 사회가 화학 물질 자체를 두려워하는 케미포비아(Chemiphobia)에 떨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화학 물질이 아주 위험한 것, 암을 유발하는 것 등으로 생각한다. 우리는 화학 물질 속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화학 물질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우리 학교 화학과 여인형 교수님께서 <화학물질의 안전성>에 대한 강연을 하실 때, 주로 아스코르브산(ascorbic acid)에 대해 이야기를 하시고는 한다. 대중들은 ‘아스코르브산’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화학물질, 위험, 발암, 혐오 등의 부정적인 단어를 생각했다. 이는 결국 많은 사람들이 화학물질을 꺼려한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스코르브산은 우리의 영양을 위해 필수적으로 섭취해야 하는 자연산 비타민C의 또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 우리는 화학 물질으로 구성된 지구에서, 더 크게는 우주에서 살고 있다. 그렇기에 화학물질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침묵의 봄』은 어떤 위험한 화학물질들의 부작용을 강조하여 사람들에게 화학물질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온다. 하지만 독자들은 이러한 책을 보고 단선적우로 모든 화학물질은 위험한 것이며, 사용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는 생각을 심게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느꼈다. 『침묵의 봄』은 과학에 기초한 기술이 생태계를 오염함을 대중에게 강렬히 인식시킨 책이며, 이 책으로 인해 DDT 사용이 금지되는 법안이 통과될 만큼이나 영향력 있는 책이기에, 한편으로 이 책으로 인해 수많은 케미포비아가 생기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이 되었다.





화학 물질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닫아야 할 이미 열려버린 고리는 레이첼 카슨의 주장처럼 살충에 있어 화학적 방제를 금하고 생물학적 방제를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과학자들과 기업이 그들의 이익만을 위해 화학 분야에 있어 무지한 소비자들을 속이지 않고, 보다 자연적인 물질을 사용한다면 고리는 차차 닫혀나갈 것이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된다. 고리를 닫기 위한 첫 단추로써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모두가 화학 물질 그 자체는 양(positive) 혹은 음(negative)의 가치를 가지지 않으며, 좋고 나쁨을 판단하며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인간임을 인지하는 것이다. 또한 그 물질의 용도를 결정하는 것 또한 인간임을 인지해야한다. 만물을 의심하며 바라보는 비판적 사고를 가지는 것이 우선일 것이며, 이것이 『침묵의 봄』이 집필된 50년이 지난 지금, 봄의 침묵을 깰 수 있는 방법일 것이다. 레이첼 카슨이 지금 살아 있다면 ‘지금의 봄의 침묵을 깰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묻고 싶다.
최일우 2018-02-05 추천(0)
[자연과기술부문 우수작]멋진신세계
경제학과 4 김*하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는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4차 산업혁명으로 인해 금융 선진화가 이루어지고 점차 많은 사람들이 문명의 혜택을 받으며 삶의 질을 높이고 있다. 또한 요즈음 직장인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워라벨(Work and Life Balance) - 일과 삶의 균형’은 바쁜 삶 속에서도 자신만의 여유에 대한 갈망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늘 반복되는 일상에서 점차 우리 주변과 비슷해지는 획일화 되어가고 있다. 지하철에서는 손 안의 스마트폰에 몰두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으며, 어쩌면 우리 주변의 사람들보다도 스마트폰 안에서의 가상의 인물들을 접하고 그들로부터 오프라인의 사람들을 형상화해 간다.



세기의 고전 중 하나인 올더스 헉슬리의 저서 <멋진 신세계>는 마치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하다. <멋진 신세계> 속의 세계는 기계 문명의 발달 이면에 사람이라는 존재를 인식하는 것이 낯설고 우스꽝스럽다. 기계 문명이 가져다 준 편리함으로 인해, 사람은 인공적으로 정해진 계획 하에 기계적으로 태어나며 길러진다. 사람이 세상의 빛을 보는 시작부터가 이미 ‘인격’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멋진 신세계>를 읽고, 오늘날의 대한민국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 계기를 아래의 두 가지 관점에서 밝히고자 한다. 첫 번째는 획일화되어 가는 사회에 대한 비판이며, 두 번째는 다소 희망적인, 그래도 여전히 사람에 대한 갈망이다. 과연 <멋진 신세계>가 요구하는 세계란 어떤 것일까?





<멋진 신세계>의 초반부에는 획일화된 사회가 등장한다. 과학기술이 고도로 발달하면서, 사람들이 기계적으로 출산을 하여 기계와 밀접한 생활을 하고, 감성이 아닌 이성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조금의 인간적인 실수와 오차를 용납하지 않는 그런 사회다.





 또한 <멋진 신세계>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부모님의 사랑이 아닌 런던의 34층 고층 건물에서 깔끔하게 소독된 곳에서 시험관 안에서 태어난다. 이미 태어나기 전부터 그들의 삶의 형태가 결정된다. 예를 들어, 미래에 광부가 될 사람이라면 태어날 때부터 광산의 열기에 적응하도록 만들어진다. 또한 사람에게도 등급이 매겨진다. 가장 상위로 분류되는 사람을 알파라 칭하며, 그 뒤 서열 순서대로 베타, 감마, 엡실론 등이다. 더욱 충격적인 부분은 조건반사실로 옮겨진 아기들에게 전기 충격을 가하여 성장하며 접하게 될 문학에 대한 즐거움을 없애버린다. 즉 감정이 없는, 완전히 기계적인 삶이 시작되는 것이다. 결국 감정이 없는 사람들로 가득한 사회는 가치관, 인격 등이 존중되지 않고 오로지 전체주의에 의해 계획되고 통제된 하나의 대형 기계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이렇듯 완벽하게 통제된 사회에서 어느 누구도 불행하지 않다가, 불현듯 우울해질 때는 마약의 일종인 소마(Soma)를 먹는다. 이 약은 불안한 마음을 안정시키고, 편안한 상태로 만들어준다. 기계 문명에 다시금 적응할 수 있도록, 사회에 대한 어떠한 의문도 용납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멋진 신세계>에도 희망의 계기를 유발하는 인물이 등장한다. 바로 존이다. 존과 그의 어머니 린다는 레니나가 뉴멕시코의 인디언 원주민 보호구역으로 여행 갔을 때 만난 인물들이다. 특히 존은 <멋진 신세계>의 주요 배경인 비인간화된 기계문명이 지배하는 세상의 인물과 정반대로 대칭되는 인물이다. 어머니 린다로부터 글을 배웠고, 셰익스피어 전집을 읽으며 언어가 가지는 매력, 사람으로서 느끼는 행복감, 부당한 것을 보았을 때의 고통, 신에 대한 깨달음까지, 사람이 본디 가져야 할 감정들을 갖게 된다. 안타깝게도, 존은 <멋진 신세계> 속 사람들에게 배척되고 소외된다. 그러나 그는 셰익스피어의 시 한 편이 첨단이나 과학, 기계보다 더욱 훌륭한 것이라고 말한다.





헉슬리는 존이라는 인물을 내세워, 과학기술의 과도한 발달이 불러오는 비인간화와 획일화에 대한 비판과 동시에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기계가 가져오는 편리함과 완벽함보다, 인간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가져야 할 기본적인 인성과 도덕의 감정, 좋고 싫음, 사랑과 증오, 긍정과 부정 등 셀 수 없는 무수한 감정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기계화되고 병든 사회를 치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비록 존은 자살이라는 비극으로 치닫지만, 그가 보여주었던 인간의 본성을 추구하고 인간 안에 담긴 문학을 탐구하는 예술성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깊은 깨달음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과학 기술의 발달 이면에 그 중요성이 점차 약화되어 가고 있는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시대의 과제를 <멋진 신세계>는 현대인들에게 다시 던지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멋진 신세계>의 ‘멋진’이 뜻하는 바를 해석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과도한 기계문명으로 인한 비인간화를 비판하기 위해 반어법을 활용한 것인지, 아니면 기계와 사람이 균형 있게 어우러지는 진정한 미래를 염두에 두고 쓴 미래지향적인 단어인지 확신이 들지 않아 오랫동안 고민하게 되었다. 오랜 시간 끝에 내리게 된 결론은 ‘멋진’이란 ‘더 멋진’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하나의 과정, 즉 과도기라는 것이다. 기계 문명의 과잉 발달로 인해 사람들이 태어나서 죽는 그 순간까지도 모두 마치 하나의 로봇처럼 살게 되는 사회가 있다면, 이같은 획일화와 비인간화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소설에 등장하는 존과 같은 인물이다. 인간의 본능이 담긴 문학과 예술을 사랑하고, 기계화의 국면에서도 사람의 가치를 중요시하는 인식의 등장은 ‘더 멋진’사회를 만드는 계기가 될 것임에 틀림없지 않을까?





<멋진 신세계> 전반에서 드러난 기계 문명은 무척 대단하다. 알약 하나가 사람의 이성을 좌지우지하는 놀라운 힘을 지녔다. <멋진 신세계>에서 드러난 것처럼, 기계 문명은 인간을 더욱 똑똑하게 만들어 주었지만, 사회에 대한 인식을 실제보다 더욱 부정적이거나 치우친 방향으로 볼 수도 있게끔 하는 부작용도 내재하고 있다. 기계 문명이 만들어 놓은 사이버 세상은 사람을 하나의 게임 캐릭터처럼 단순화하기도 한다. 가상에서 만들어진 수많은 캐릭터들이 서로의 개성을 존중하기보다는, 오직 생각이 같은 캐릭터와 교류하기를 원하도록 만들기도 한다. 이에 필요한 것은 인간 본연의 존재 이유를 인식하고, 서로 존중하는 문화가 마련되는 것이다.





<멋진 신세계>는 기계문명의 무분별한 추종으로 정작 중요한 사람의 가치를 도외시하는 주객전도된 행태를 고발하는 풍자의 우화 소설로서, 오랜 세월 세계적으로 사랑받은 고전이다. 미래 대한민국은 4차 산업혁명이라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비록 기계가 인간의 업무 범위를 넘나든다 할지라도, 인간의 가치가 더욱 상위임을 잊지 않아야 한다. 사회 갈등으로 인해 소요되는 각종 비용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높아지고 있다. 예술이든, 문학 작품이든, 주변 사람들과 소중한 시간을 함께하는 것이든 갈등을 치유하고 인간 본연의 가치를 회복하는 그 어떤 일이든지 존중받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앞으로 우리가 만들어 나갈 미래 대한민국이 ‘더 멋진 신세계’로 거듭나는 방법일 것이다.






 
최일우 2018-02-05 추천(0)
[자연과기술부문 우수작]기후변화의 정치경제학
건축공학과 4 장*호





 

지구온난화는 이미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인식된 전 지구적 문제이지만 아직도 그 영향력에 의문을 갖는 과학자와 정치인이 많다. 때문에 많은 저자들이 과학적 연구결과를 토대로 자신들의 주장을 합리화하는 저서를 남겼다. 저자 마크 마슬린은 런던대학 기후학 교수로서 이 많은 사람들 중 한명이다. 그의 저서 ‘기후변화의 정치경제학’이 다른 책들과 비교되는 것은 이것은 지구온난화의 징후와 결과 뿐만 아니라 정치적, 경제적, 국제사회적인 방향성도 제시한다.





그의 입장을 간추리자면 그는 지구온난화의 영향력을 무시하지 않는다. 그는 남극의 빙하시료, 해양대류현상, 이상기후, 대기 중 온실가스의 농도, 기후모델 등을 통해 지구온난화는 무시할 수 없는 현상이며 그 결과로 인한 미래는 지금과는 아주 다르고 그것이 인류의 심각한 위기를 가져온다는 것을 주장했다.





일반적으로 지구온난화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다면 날씨가 갑자기 추워진 것에 대해 지구온난화에 의구심을 가질 수 있다. 지구온난화는 수많은 변수들이 서로 상호작용해서 그 결과는 사실 예측이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지구의 기후는 우리가 겪어보던 것과는 달라질 것이고 견뎌낼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설 것이며 그럼으로써 그것에 대처하고 복구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 빙하기 이후 산업혁명 전까지의 온도와 산업혁명 이후의 온도를 비교했을 때 그 후자가 약 0.74도 가량 높다고 한다. 어쩌면 0.74도는 아무것도 아닐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것은 기후변화의 심각성을 간과한 것이다. 온도가 높아지면 동식물과 바닷속 산호초 등 생태계에 변화를 야기하고 남극의 빙상을 녹여 해수면이 높아진다. 이것이 다시 해발고도가 낮은 땅을 잠식하고 인간의 삶의 터전을 허문다. 이로 인해 영국은 런던에 템스 베리어라는 해벽을 건설했다. 신혼여지로 유명했던 몰디브라는 인도양 북부에 위치한 섬나라는 언젠가 물에 잠길 것이라고 한다. 이것이 끝이 아니다. 바다의 온도가 상승하면 해류의 순환에 변동이 생기고 엘니뇨 남방진동의 주기를 예측불가능하게 한다. 인도의 몬순(Monsoon)기가 길어지고 작물재배에 영향을 준다. 이는 그 해에 국가경제에 영향을 줄 것이다. 인도 뿐만이 아니라 전세계가 가뭄, 열파, 홍수, 해일 등의 이상기후 현상으로 앓을 것이다.





마크 마슬린은 이런 기후변화에 대해 하나의 예시를 들어 설명했다. 온실가스 배출로 인한 기후변화는 자동차를 밀어서 언덕 위에 도달하는 것과 같다고 말이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기후변화는 자동차를 애써 밀며 언덕 위를 오르는 중이다. 힘들고 더디지만 바퀴가 구르기 시작하면 언덕에 도달할 수 있다. 문제는 그 이후다. 한번 정점을 찍으면 그 이후부터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의 단계가 된다. 언덕 위에서 아래로 차를 밀어버리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문제는 우리는 언덕의 어느 정도까지 올라온 것일까? 많은 과학자들이 어느 정도의 미래에 기후변화가 급격해질 것을 예상했는데 우리에게 좋은 결과는 없다.





그는 지구온난화의 해결책에 대해서도 언급했고 여러 과학자들이 제시한 해결방안에 대해서 반론을 제기하기도 했다. 그는 원전건설에 대해서 이산화탄소 배출은 적지만 안전성의 문제가 있다는 지적을 했고 풍력, 태양열, 태양력 등의 천연자원의 증가와 화석연료의 사용을 줄이고 무엇보다도 우리의 소비습관을 바꿀 것을 주장했다. 사실 저자가 해결책을 제시하긴 했지만 그는 지구온난화 현상이지금보다 나아질 것이라는 것에 대해서 회의적이고 굉장히 현실적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 번째, 전 세계 어느 나라든 자신이 점유한 땅의 자원을 소비하고 국가경제를 증대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는 선진국이든 개발도상국이든 마찬가지이다. 1997년의 유엔기후변화협약을 통해 교토의정서가 채택됐다. 주된 내용은 각 당사국들의 온실가스배출량의 감축이다. 이 의정서의 온실가스배출량 감축의무가 있는 국가는 선진국 뿐 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현실을 보라. 중국과 인도는 인구가 어마어마하고 전 세계 기업들의 공장이 위치해있다. 이 국가들에게 감축의무를 부담시키지 않는 것은 불합리하다. 때문에 2020년 이후 발효될 2015년 유엔기후변화협약에서 채택된 파리협약은 개발도상국을 포함한 모든 당사국을 대상으로 한다. 그럼 해결된 것일까? 미국은 2001년 당시 온실가스 배출량이 세계최고였으나 자국의 경제에 피해를 줄 것이라는 것을 이유로 교토의정서에서 탈퇴했다. 얼마 전 도널드 트럼프가 당선됐을 때, 그가 당선되지마자 한 것이 파리협약 탈퇴라는 것은 모두 주지하고 있을 것이다.





두 번째, 우리가 미래를 생각할 때 우리는 절대 지구의 기후와 환경을 염두하지 않는다. 어릴 때부터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장래희망을 생각한다. 누구나 자신만의 꿈을 갖는다. 예를 들면 누군가는 집을 사고 좋은 자동차를 갖고 싶을 것이다. 누군가는 세계일주를 꿈꾸기도 한다. 그러나 이 모든 사회활동에 이산화탄소가 배출되고 자원이 소모된다. 이는 기후변화의 위험성을 인지하면서도 그것의 개선을 하나의 선언적인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신의 발전 뿐 아니라 그 후대와 지구의 존속을 실질적으로 지향한다면 이미 해결하고도 남을 문제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불가능한 이유는 우리는 모두 인간이기 때문이다.





경제학적 관점에 대해서 저자가 가장 많이 언급한 것은 2006년 발간된 영국의 경제학자 니콜라스 스턴의 보고서이다. 이 보고서에 의하면 2050년까지 전 세계가 매년 GDP의 1%를 투자해서 온실가스배출을 억제 혹은 유지한다면 전 지구적 재앙을 막을 수 있으며, 이를 그냥 방치한다면 매년 전 세계 GDP의 20%를 투자해야 한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그의 주장은 더 이상 지구온난화에 대한 문제는 그것이 실재하는 것인가, 아닌가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 결과로 인해 얼마나 적응가능하고 대처할 수 있냐는 것이다. 그는 이 주장을 하면서 소외된 인류에 대해 언급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의 도입에 따라 어느 나라는 이웃나라보다 더 빨리 더 급격히 성장하기도 하고 외부문명과 단절된 기간이 길었던 국가의 경우는 아직도 원시적이라 여겨질 만한 문화를 갖고 있기도 하다. 부가 불균등하게 분배되는 것이다. 가난한 국가들의 문제는 급격한 기후변화가 일어났을 때 그에 대해 대처하고 복구할 인프라 구축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급격한 기후변화 이후 이 가장 가난한 사람들은 기후변화의 가장 큰 피해자가 될 것이다. 세계 경제는 탄소에 기초했는데 이는 탄소가 가장 저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 탄소는 지금 전 지구적 재앙을 초래하기 일보 직전이며 탄소 배출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던 국가도 결국 이 문제의 피해자가 될 것이다. 저자는 이 점을 강조하면서 그는 정치지도자들을 강력하게 비판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지구온난화와 부의 불균형을 별개의 문제로 바라봤기 때문이라고 한다.





자국의 경제성장을 위해 우리는 1세기 전부터 엄청난 양의 탄소를 배출했고 자원을 소비했다. 약 30~40년 전부터 지구온난화의 위험성에 대해 학자들이 주장했고 이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구온난화의 의미와 원인을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우리 인류는 언덕 위로 자동차를 밀고 있다. 그의 저서는 단순히 지구온난화의 결과를 경고하는 것 뿐만 아니라 다양한 관점에서의 문제점을 제시했다. 지구온난화는 더 이상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다를 따질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팔을 걷고 실천해야할 문제이다. 당장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어릴 때 학교에서 배웠던 환경보전을 위한 상식적인 행위들과 다르지 않다. 거기에 지구 반대편에 살고 있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이타심만 있으면 충분하다.

2020년 이후 파리협약에 의해 모든 당사국은 개발도상국을 포함해서 온실가스배출량 감축의무를 진다. 아직도 정기적인 회의를 통해 그 의무범위를 정하고 있다. 아직 시간은 있고 미래를 긍정적으로 바꿀 가능성은 충분하다.




 
최일우 2018-02-05 추천(0)
[경제와사회부문 최우수작]감시와 처벌
영화영상학과 2 이*선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다. 인간은 사회를 만들어 살아가고, 자연스럽게 그 안에서 권력 관계와 규칙들이 생긴다. 미셸 푸코의 감시와 처벌은 이러한 권력의 미시물리학과 신체의 정치경제학에 대해 다루는 책이다.





이 책은 국왕살해범인 다미엥의 처형 과정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글로 시작한다. 단순히 죄인의 목숨을 빼앗는 사형이 아니라 그 광경을 목격하는 사람들에게 공포를 심어주기 위한 목적의 잔인한 처형 과정을 읽다보면 그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져서 끔찍하기까지 하다. 신체형이 일반적이던 시기에는 권력이 이러한 방식으로 자신의 힘을 과시하면서 대중에게 공포를 심어주고 그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신체형은 자취를 감추었다. 그 대신 등장한 것이 바로 규율이다. 푸코는 규율을 ‘순종적인 신체’를 만들기 위한 수단이라고 말한다. 순종하는 신체는 복종시킬 수 있고, 쓰임새 있고, 변화 가능하며 나아가 완전하게 만들 수 있는 신체이다. 어떤 사회에서나 신체는 권력에 의해 지배받거나 의무를 가졌지만 규율의 방식은 기술적 측면에서 세 가지 새로운 점이 있다. 첫째, 통제의 규모가 다르다. 둘째, 통제의 대상이 다르다. 셋째, 통제의 양상이 다르다. 이는 노예제나 봉건제보다 훨씬 세련된 지배관계이다. 규율의 역사적 시기에는 신체에 대한 하나의 기준이 생겨나며, 인간의 신체는 권력 장치 속에 들어간다. 규율은 복종되고 훈련된, 순종하는 신체를 만들어낸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러한 규율이 흥미로운 지점은, 푸코가 이야기하는 규율 방식의 통제가 우리의 삶 속에서 빈번하게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감시와 처벌에서 설명하고 있는 규율의 방식들이 가장 정확하게 적용되는 사회는, 대부분의 우리가 청소년기에 하루의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학교이다. 공간에 따른 개인의 분할, 시간표와 교육의 체계 등은 12년간 학교를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몸에 익히게 된 감각들이다. 이러한 규율 사회 속에서 순응적인 학생이었던 사람들이 자라난 사회는 순종적이고 다루기 쉬운 대중들로 가득할 것이 당연하다.





규율을 바탕으로 하는 권력은 사취나 강제징수 대신 ‘훈육하는 일’을 주기능으로 한다. 이러한 규율에 따른 징벌은 사법체계의 형벌과는 다르다. 속죄를 목표로 삼지도 않고, 억압을 목표로 삼지도 않는다. 규율에 따른 징벌은 일탈행위를 없애도록 하는 기능을 하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교정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또한 규율에서의 처벌은 보상-제재라는 이중적 체계의 한 요소일 뿐이기 때문에 벌을 주기보다는 상을 주도록 애써야 한다.





규율에서 서열이나 등급에 의한 분류는 이중적 역할을 한다. 첫째는 차이를 명시하고 자질과 능력과 적성을 등급화 하는 것이고, 둘째는 벌을 내리고 상을 주는 것이다. 규율은 승진, 진급을 통해 포상하거나 낙제시키고 서열을 떨어뜨림으로써 벌한다. 서열 자체가 보상 혹은 처벌과 같은 것이다. 감시와 더불어 규범화는 권력의 중요한 도구가 된다.





시험은 감시하는 위계질서의 기술과 규격화를 만드는 상벌 제도의 기술을 결합시킨 것이다. 시험은 개인을 자료의 영역에 집어넣는다. 개인에 대한 일련의 모든 기호체계가 형성되며, 그것은 시험에 의해 확정된 개개인의 특징을 동질화하면서 그 특징을 기록할 수 있게 만든다.





이러한 규율의 작용 방식에 대한 설명들 역시 학교라는 집단이 작동하는 방식과 매우 유사하다. 아직도 몇몇 고등학교에 남아있는 특별반이나 성적이 좋은 학생들만 들어갈 수 있는 야자실과 기숙사가 서열이나 등급에 의한 분류의 대표적인 예이다. 단순히 특별반에 들어갈 수 있게 하거나 성적이 떨어진 학생을 야자실에서 쫓아내는 것만으로도 힘을 들이지 않고 보상과 처벌을 할 수 있는 수단이 된다.





다음으로 설명하고 있는 시험이야말로 학교가 돌아가는 가장 기본적인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학교들이 그렇지만 특히 고등학교는, 한 학기가 시험으로 시작해서 시험으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3월 모의고사와 중간고사, 6월 모의고사와 기말고사, 그리고 그 사이에 끊임없이 치루는 각종 수행평가와 쪽지시험들. 이 모든 것들은 점수화되어 기록되고 개인의 학업성취도와 성실도를 판단하는 수단이 된다.





시험이 개인을 자료의 영역에 집어넣는다는 표현은 고등학교의 생활기록부를 연상시킨다. 생활기록부에는 학생이 입학해서 졸업할 때까지의 모든 출결 사항과 시험 성적, 그리고 담당 선생의 주관적인 평가까지 모두 들어있다. 생활기록부를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해당 학생에 대한 정보를 거의 전부 다 알 수 있다는 사실은 학생들의 일상이 얼마나 기록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는지를 상기시킨다. 이처럼 시험은 개인을 권력의 결과와 대상으로 만드는 여러 방식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이토록 규율로 가득한 학교라는 작은 사회에서 벗어난다고 해서 규율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푸코가 감시와 처벌을 썼던 시대보다 현대 사회가 더욱 규율로 가득한 사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대 사회에서 개인의 모든 사생활은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전부 기록되어 자료로 남게 된다. 곳곳에 위치한 CCTV와 이동 경로를 기록하는 GPS, 그리고 현대인의 일상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컴퓨터와 핸드폰을 통한 각종 인터넷 상의 기록들까지. 이렇게 일상화된 감시는 감시하는 사람이 없더라도 스스로를 검열하게끔 한다. 이것이 푸코가 이야기하는 판옵티콘의 개념이다.





감시와 처벌의 부제는 ‘감옥의 역사’이지만, 감옥은 그저 규율 사회를 단순화시켜 눈에 보이는 형식으로 만들어두었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감옥은 현실 사회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다. 혹은, 현실 사회가 하나의 거대한 감옥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가 자유 의지를 가지고 살아간다고 생각하지만 어쩌면 그 자유의지 이전에 우리를 통제하고 훈육시켜 순종적인 신체로 만들고자 하는 규율의 존재를 잊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감시와 처벌을 읽고 난 후 너무도 거대하고 일상화된 규율의 존재를 피부로 실감하곤 한다. 우리가 스스로 생각하고 선택한다고 여겼던 일들이 과연 우리의 자유의지에 의한 것일까 하는 근본적인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질 않는다. 의식하지 못하는 아주 사소한 순간까지도 규율의 통제 아래에 있었다는 무력감 역시 어깨를 짓누른다. 아무리 열심히 살아가도 결국은 규율 사회라는 거대한 감옥 안에 있을 뿐이라는 사실은 자칫 삶의 의미를 잃거나 무기력한 인간을 만들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규율 방식의 통제가 사회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 하나를 깨달은 것만으로도 세상을 보는 시각이 크게 변화한 것을 느낀다. 우리가 책을 읽고 사유하는 일차적인 목표는 현실을 깨닫는 것에 있다. 똑같이 규율의 통제 아래에 있더라도 그 사실을 전혀 모른 채로 살아가는 것과 규율의 존재를 명확히 깨닫는 것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이러한 작은 변화와 앞으로도 오랜 시간이 걸릴 깊은 사유들이 모여 ‘나’라는 인간을 보다 나은 사람으로 만들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사회는 이렇게 앞으로 한 발자국씩을 꾸준히 내딛는 작은 ‘나’들로부터 변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비록 지금은 깜깜한 어둠 속에 있는 것 같이 느껴질지라도 이 한 걸음을 걸어 올라가다보면 막힌 시야가 뚫리듯 시원해지는 순간이 오지 않을까. 그런 순간을 기다리며 오늘도 책장을 넘겨본다.


 

 
최일우 2018-02-05 추천(0)
[경제와사회부문 우수작]향연
식품생명공학과 2 이*수








『향연』은 다채로운 관점을 통해 사랑 즉, 에로스에 대한 다양한 시각 및 수준을 보여준다. 『향연』 속에 등장하는 에로스는 주로 ‘X의 에로스’ 즉, X에 대한, X에 향한 에로스로 표현된다. 이는 에로스가 그 자체로 정의될 수 없음을 말하며 ‘무엇과의 관계’ 속에서만 정의됨을 뜻한다. ‘무엇과의 관계’는 형제와 자매의 관계로 쉽게 설명되는데, 동생은 형과 언니와의 관계를 통해서만 규정될 수 있듯이 에로스도 X와의 관계를 통해서만 규정된다.





X에 대한, X에 향한 에로스라는 표현에서와 같이 에로스는 X(어떤 것)을 욕망한다. 어떤 것을 욕망한다는 것은 동시에 어떤 것이 결핍 되어있음을 나타낸다. 욕망과 결핍의 상관성은 다음과 같은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이미 소유하고 있는 것을 욕망하는 것은 어떻게 설명이 가능한가? 건강한데도 건강하기를 바라고, 부자인데도 또한 부자이기를 바라는 것은 건강과 부와 같은 욕망하는 대상이 언젠간 상실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는 X(어떤 것)이 나중에도 늘 지속되고 영원히 곁에 있기를 바란다.





에로스가 자신이 결여하고 갖고 있지 않은 것을 사랑한다면, 과연 에로스는 아름다운 것인가? 좋은 것들이 아름답기도 하다면, 과연 에로스는 좋은 것인가? 이와 같은 질문에 대해 다오티마는 중간자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답을 도출해 낸다. 지금까지 합의된 것에 따르면, 에로스는 아름답지 않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아름답지 않다’는 상태는 아름답다와 대립되는 단어인 추함이 아니다. 아름다움과 추함 사이에 있는 그 어떤 것이며 마찬가지로, 에로스는 좋은 것과 나쁜 것 사이에 존재하는 그 어떤 것이다. 더 나아가, 에로스는 지혜로운 것과 무지한 것 사이의 ‘의견은 있지만 근거가 부재된 상태’의 것이다. 다오티마는 이를 중간자라 칭한다. 즉, 에로스는 아름다운 것, 좋은 것, 지혜로운 것을 욕구하는 중간자인 것이다.





에로스의 욕구 대상인 아름다운 것, 좋은 것, 지혜로운 것은 진선미를 상징하며 이는 아름다움 자체, 좋음 자체, 지혜로움 자체를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또한 ‘~인 것 자체’라는 용어는 플라톤의 사유를 상징하는 원형 및 이상형과 직접적인 관련을 맺으며 이데아 그 자체를 가리킨다. 이데아는 생성되지도 소멸되지도 않으며 형이상학적 세계에서만 실현되는데 이는 다시 말해 ‘~인 것 자체’가 이데아와 동일한 성질을 내포함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에로스가 욕구하는 욕망의 대상은 이데아를 통해 부연설명 될 수 있다. 플라톤은 내각의 합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180 인 삼각형이 바로 이데아의 세계에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었다. 현실세계에는 완전한 상태의 삼각형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아름다움 자체, 좋음 자체, 지혜로움 자체란 현실 세계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곧 현실세계에서의 X에 대한 결핍을 뜻하며 이 결핍을 메우려는 욕망이야 말로 플라톤이 지향하는 욕망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욕망은 그 자체로 이데아를 상징하며 X의 지향점이 이데아에 있음을 나타낸다.





그렇다면 이데아는 어떻게 형상화되는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와 같은 질문에 대해 존재의 네 가지 원인이 되는 질료인, 형상인, 작용인, 목적인을 바탕으로 답하고 있으며 이들이 모두 존재에 선행한다고 말한다. 의자를 예로 들어보자, 질료인이란 의자의 재료로 쓰이는 나무를 뜻하고, 형상인은 설계도면과 같은 의자의 원형을 뜻하며 작용인은 의자를 제작하는 목수를 뜻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가장 중점을 두고 있는 목적인은 의자의 용도, 기능 역할을 의미하며 이는 곧 의자의 목적, 더 나아가 본질을 뜻한다. 이 중 형상인은 이데아와 그 의미를 같이하며 플라톤은 이데아가 구체적 사물 즉, 질료인 안에 들어가 있다고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이 주장하는 이데아의 선재성과 실체 및 본질론은 본질주의와 깊은 관련이 있다. 본질주의는 선 본질 후 존재적 존재관을 말한다. 이는 그 자체로 장단점을 모두 갖는데, 모든 것이 정해진 용도, 기능, 역할을 통해 설계된 것이라는 주장과 본질이 존재 이전부터 있어왔다는 말은 사람의 존재 이유에도 적용되어 개개인 모두에게 존재 이유와 의미를 부여한다. 이로써 사람들은 각자의 목적과 본질을 지닌 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역으로 본질이 이미 정해진 존재와 그 존재가 살아가는 이유는 본질에만 달려 있음을 의미하여 살아감에 있어 본질을 잃게 되면 그와 동시에 우리는 삶을 사는 목적, 더 나아가 존재 이유를 잃게 된다. 의자가 그의 본질인 ‘사람을 앉히는 것’이라는 목적 즉, 용도, 기능, 역할을 상실하면 버려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이처럼 본질의 선행으로부터 야기된 장점은 부메랑과 같이 곧 단점이 되어 돌아오기도 한다.





본질주위와 상반되는 입장인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즉, 실존주의는 인간 실존은 실존함이 먼저이고, 그 다음 스스로를 자신이 원하는 바대로 만들고 정의한다는 의미로 선 본질 후 존재적 존재관을 지지한다. 샤르트르는 인간을 존재가 아닌‘무’라고 말한다. ‘무’라는 것은 인간에게 미리 주어진 어떤 본질이 없다는 것을 뜻한다. 본질주의는 주어진 본질을 수행하여야만 나로서 존재하게 되는 반면 실존주의는 내가 하는 모든 것이 나의 본질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실존주의에서의 생의 모든 순간은 선택으로 가득 차있다. 이를 표현한 구절이 바로 ‘C between B and D’이다. C는 choice(선택)을, B는 birth(탄생)을, D는 death(죽음)을 의미하여 태어남과 죽음 사이의 실존함에는 결국 수많은 선택만이 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실존주의는 생전 세계 및 사후 세계를 일컫는 형이상학적 세계를 부정하게 된다.





수많은 선택은 동시에 샤르트르가 인간을 ‘대자’라는 개념으로 규정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대자와 즉자의 근본적인 차이는 의식의 유무에 있다. 즉자는 주체로서만 존재하여 의식과 자기의식이 결여되어 있는 반면 대자는 자기 자신과 대면하는 자아 즉, 객체를 통한 의식과 자유의식이 존재한다.





여기서 샤르트르가 말하는 ‘의식’은 기존의 의식에 관한 해설과는 다르다. 생각한다와 의식한다의 차이를 생각하면 이해가 쉬운데, ‘나는 의식한다 나를.’이라는 문장에서의 ‘나’는 주체와 분리된 새롭고 낯선 자아를 의미한다. 컴퓨터를 예로 들어 보면 ‘나는 생각한다 고장 난 컴퓨터를’는 컴퓨터가 고장 난 현재 상태만을 생각하는 것이다. 반대로 ‘나는 의식한다 고장 난 컴퓨터를’은 고장 난 컴퓨터가 아닌, 고장 난 컴퓨터에게는 없는, 고장 난 컴퓨터와는 다른 것을 떠올리는 과정이다. 이것을 자아의식에 적용시키면 위에서 말한 ‘나는 의식한다 나를’이라는 문장은 예시의 컴퓨터와 마찬가지로 ‘나’와는 다른, ‘나’에게는 없는, ‘나’가 아닌 것을 떠올리는 과정이다.





더 나아가, 대자는 사실성으로부터 벗어나 초월성을 갖게 된다. ‘나’가 아닌 것은 부정을, ‘나’에게 없는 것은 결함을, ‘나’와 다른 상태는 초월을 의미한다. 이는 의식의 지향성 및 무화작용 즉, ‘의식의 본성은 그것이 아닌 것일 수 있음이며 동시에 그것으로 있을 수 없음이다.’와 관련된다. 그것이 아닌 것은 무화작용의 일종으로 지금 현존하는 의식내용과 항상 지속적으로 불일치하고자 하는 대자 존재의 의식을 뜻하며 마찬가지로 그것으로 있을 수 없음은 의식의 지향성을 말하며 의식은 ‘현존하는 존재’가 아닌, ‘또 다른 무엇인가’를 향함을 뜻한다. 지향성은 고정 목적을 갖는 것이 아니라, 결핍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무화작용을 통해 항상 부정과 초월의 연속선상에 있으므로 의식은 항상 미정 상태이다. 이러한 미정 상태가 곧 자유로운 의식을 상징하는데, 이는 곧 실존의 ‘자유로움’을 대변한다.





한때는 즐겨 앉았던 의자도 시간이 지나면 싫증이 난다. 의자는 더 이상 우리로부터 사랑 받지 못하는 불행한 상태에 빠지게 되지만, 자유를 가진 타자의 경우 상황은 전혀 다르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관심이 줄어들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순간 언제든지 그 상황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실존주의를 통해 궁극적으로 인간 행위의 자유성을 토론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처럼 우리는 언제나 욕구하며, 에로스의 욕구대상인 이데아는 실존과 본질의 사이에 존재하는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향연』에서 플라톤이 궁극적으로 제시하는 에로스 즉, 선을 영원히 소유하기 위한 욕망은 그 대상이 영원하고 불변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동시에 대상이 지닌 속상 또한 불멸함을 나타낸다. 대상 그 자체가 지닌 본질의 실존에 대한 선후관계는 현대사회에서도 꾸준히 논의되고 있다. 따라서 플라톤이 주장하는 선에 대한 욕망, 에로스를 판단하는 기준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 우리는 서로의 지향관계에 있는 본질과 실존의 흐름 속에서 끊임없이 고찰해야 할 것이다.






 

최일우 2018-02-05 추천(0)
[경제와사회부문 우수작]공산당 선언
가정교육학과 4 이*원







공산당 선언의 첫 줄 “이제까지 사회의 모든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 과연 강렬하면서도 사회에 대한 매우 통찰력 있는 문장이다. 이 문장을 바탕으로 과연 역사가 투쟁의 결과인지 아닌지 세미나 때 토론을 했다. 대부분 토론 참여자들은 반대 토론자에게만 엄청난 질문을 퍼붓고 찬성토론자에게는 반하는 내용의 질문조차 하지 못했다. 이러한 토론과정을 보며 정말 우리는 투쟁만 하면서 지내왔을까 의문이 들었다.





사실 역사를 사건들의 연속으로 볼 때 특정 지배계층이 나머지 피지배계층을 다스렸던 시간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닌데 말이다. 오히려 투쟁은 역사의 전환점 정도인 것 같다. 마르크스가 계급 간 투쟁을 통한 이상적 공산주의가 실현되지 않은 현 시대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왜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탄생 된 뒤 새로운 계급이 나타나지 않은 것일까?





사실 공산당이라는 말만 들어도 우리는 역사적 경험 또는 잘못된 이데올로기 형성 때문에 지레 겁을 먹는다. 진정한 자본주의의 의미를 알려면 반대되는 공산주의 또한 뭔지 알아야 하는데 말이다. 필자 또한 이 책을 읽기 전 공산주의에 대한 막연한 거부감이 있었고 머릿속에 북한의 모습이 먼저 그려졌다. 그러나 이러한 편견을 마르크스는 깨뜨리게 해주었다.





마르크스는 초반에 봉건사회가 산업혁명을 겪으며 생산수단과 이를 소유하는 계급에 대한 변화를 통해 새롭게 탄생된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에 대해 이야기 한다. 부르주아는 지금까지 신앙의 성스러움 기사의 열광을 이기적 타산이라는 얼음같이 차가운 물속에 익사 시키며 모든 감동적이고 감상적인 베일을 순전한 금전관계로 전환시켰다고 했다. 자본가들의 이기심을 단순하면서도 과격한 비유로 마치 내 숨통을 조이는 표현이었다. 이런 부르주아는 공급과잉이라는 빠져나올 수 없는 굴레에서 또 다른 생산품 판로를 찾기 위해 세계화가 시작되었다. 이런 세계화는 지금의 물질적 정신적 재산을 공유하는 세상을 만들 수 있게 했지만 식민지 정책으로 인하여 야만적인 나라들을 문명국가들에 동양을 서양에게 의존하게 만들었다.



21세기에도 여전히 영어를 배우고 할리우드 문화에 젖어 있는 것을 보니 이들의 영향력은 아직도 무지막지한 것 같다. 이렇게 부르주아를 양성한 토대인 생산 수단과 교류 수단은 봉건 사회에서 생성 되었고 봉건적인 소유관계는 모순적 한계에 치달아 이들을 묶고 있던 무수한 족쇄들은 폭파되었고 대신 자유경쟁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아직도 우리는 먹고 사는 문제를 자본주의 시장경제라는 시스템을 통해 이루어진다. 말하자면,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 즉, 노동자 계급을 중심으로 이들을 위한 이들의 이익에 대해 끊임없이 주장했던 것이다. 동국대학교에서도 모든 학생들이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되리란 보장은 없지만 취업을 준비하는 대부분의 학생들이 노동 계급에 합류할 준비를 하는 중 같다. 그렇다면 더욱 이 계급의 특성과 부르주아의 관계를 아는 건 필수적이다.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결국 부르주아 계급에게 노동착취를 당할 수밖에 없는 구조 속에 살지만 그들을 향한 무기 또 한 가지고 있다고 한다. 부르주아는 생산을 통해 자신들을 이익을 얻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를 필요로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에게 최소한의 조건들로 그들의 삶을 보장해주지 않기 때문에 지배할 수 없으며 부가 오직 그들의 사적 개인의 수중에 축적되게 함으로서 그들의 몰락과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승리는 불가피하다고 한다.



그렇다면 공산주의와 이 두 계급의 대립은 어떤 관계인가? 마르크스는 공산주의를 간단히 요약하여 소유 일반의 폐지가 아니라 시민적 소유의 폐지라 주장한다. 지금까지 소유가 자본과 임금 노동의 대립 속에 존재한다면 공산주의에서의 자본은 공동의 산물이고 사회 전체 구성원들의 공동 활동을 통해서만 비로소 가동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개인에 의한 개인의 착취가 폐지되고 국가에 의한 다른 국가의 착취도 폐지될 수 있다. 한 시대의 지배계급으로 인한 편향된 이념들도 해체될 것이다.





어디선가 이런 표현들은 대단히 강압적이고 마치 열심히 일 한 사람들과 하루 종일 나태한 사람들이 동등한 대우를 받게 하자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생산수단 즉 자본만 국가에 의해 통제하고 사회적 권력을 통해 분배함으로서 그 외 노동을 통한 개인적 부는 축적해도 된다고 주장했다. 헤겔과 달리 부르주아를 마지막 계급의 단계라고 생각하지 않은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에게 단결하라며 권력도 계급도 없는 이상적인 공산주의를 향해 달려가자 한다.



이러한 주장을 부르주아 계급에서 당연히 좋아할 리가 없다. 따라서 마르크스는 이러한 사상을 비밀리에 조직하고 여러 국가에서의 추방도 감수해야했다. 결국 런던에서 엥겔스와 함께 공산당 선언을 발표한 후 곧이어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지만 실패에 이르렀다. 그 이후 러시아도 공산주의 체제를 택하지만 결국 파산하고 다시 자본주의 체제로 돌아섰다. 이렇게 우리는 마르크스가 주장한 공산주의 이후 수많은 과정을 거쳤지만 여전히 대부분의 나라가 자본주의 체제를 선택한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다.





오늘날까지도 공산주의가 마음 속 어딘가 불편함을 이끄는 단어다. 마르크스는 경제적위기가 왜 일어나는지 돈이 왜 전지전능한지, 자본이 어디서 기원하는지 이 모든 것을 철저히 분석하려 노력했고 이러한 과정 속에서 논리적 추론을 바탕으로 공산주의 체제 즉 프롤레타리아의 입장에 서서 이들을 위한 체제를 주장한 것이다. 그렇지만 다수를 차지하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사람들은 여전히 자본가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치와 언론에 호응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마르크스가 현 시대 사람들을 본다면 참으로 어리석거나 경제와 정치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부족하니 가서 공산당 선언, 자본론과 같은 책 좀 읽고 오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공산당 선언을 통해 지금까지 잘못 이해해왔던 공산주의 체제가 비로소 어떤 이상향을 추구하는지 알 수 있었다. 이 책을 읽고 공산주의를 지지하자는 의미가 아니다. 사실 소련이 공산주의 체제를 선택하고 실패하게 된 수많은 이유가 있다. 인간 자체를 합리적인 도덕적인 존재로 보았지만 잘못된 판단이었고 국가도 어디까지나 인간에 의해 통치되고 수많은 인간으로 이루어진 조직이다.





따라서 이런 수많은 실패요인을 보면, 신자유주의 체제 속 살아가는 우리가 올바른 선택을 한 건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적 공산주의를 실현하는 국가는 아직까지 없지만 공정한 분배에 집중한 사회민주주의 국가는 있다. 사실 우리가 맨날 복지가 잘 되어있는 나라, 살기 좋은 나라를 얘기할 때 말하는 북유럽국가들이다. 이렇게 경제체제는 자유주의가 옳고 공산주의는 틀렸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서로 추구하는 방향이 다를 뿐이다. 우리는 두 체제 사이 그 어딘가 쯤 존재하는 것으로 보아 두 체제에 대해 알아야 할 필요성이 있다.





학교를 걸어 올라갈 때면 취업을 위한 여러 현수막이 걸려있고 다양한 취업 준비 프로그램들을 소개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초중고를 지나 대학마저 기업들이 원하는 인재상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만 같다. 대자보로 의견을 표현하는 학생들은 점점 사라지며 종북 프레임에 갇혀 공산주의와 독재주의를 구별하기 힘든 것 같다. 필자 또한 당장 눈앞에 있는 과제와 시험을 해치우기 급급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 이런 점에서 명작은 몇 십 년 아니 몇 백 년 전에 쓰인 책 이지만 우리에게 아직도 시사점을 주고 세상을 바라보는 통찰력에 기여하는 것 같다. 참으로 신기할 따름이다. 책을 한권도 읽지 않는 것보다 한 종류의 책만 읽는 것이 더 무서운 사상을 키우는 것처럼 자본주의에 가까운 신자유주의 체제 속에 살아가는 시민으로서 공산주의에 대한 개념 이해는 필수적이지 않나 싶다.

 
최일우 2018-01-10 추천(0)
[존재와역사부문 최우수작]세계 시민적 관점에서 본 보편사의 이념


국어교육과 2 박*훈

 



인간은 여러 감정과 지식들을 개념으로 범주화하여 이해한다. 그리고 각기 다른 양상으로 일어나는 현상들의 난잡한 모습은 개개인만의 여러 기준을 사용하여 손쉽게 처리한다. 여기서 개념이나 범주화와 같은 기준을 ‘법칙’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법칙을 역사에도 적용 가능할까?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역사를 하나의 법칙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를 부정적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인간의 행위는 자유를 바탕을 이루어지기 때문에 하나의 모습으로 귀결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칸트는 역사가 어떠한 규칙과 목적에 따라 이루어지며 이에 따라 보편적 역사 서술도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역사학자가 아닌 철학자로서― 그 생각의 증명을‘세계 시민적 관점에서 본 보편사의 이념’에서 시도하였다. 그렇다면 칸트가 보편적인 역사 서술이 가능하다고 생각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내기 위해서는 칸트에게 있어 ‘역사철학’이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지에 대해 먼저 파악할 필요가 있다. 칸트의 입장에서 역사는, 인간이 지닌 의지의 자유가 외부로 나타나는 현상을 다루는 작업이다. 이를 세밀하게 바라보면, 역사는 의지의 자유에 대한 탐구와 그것이 현상으로서 표출되는 작업을 동시에 거쳐야 한다. 여기서 의지의 자유는 자유인으로 여겨지는 물자체 차원으로서의 인간을 다룸으로써 파악 가능하며, 그것이 표출되는 것은 인간을 사물과 동등하게 취급하는 현상적 차원으로서 바라보아야 이해 가능하다. 즉 인간은, 자유의지를 갖는 행위의 주체로 규정되면서도 그와 동시에 자연의 세계 속에서 인식의 대상으로 상정된다는 점에서, 두 세계의 경계선에 걸터앉은 존재가 된다. 따라서 인간을 탐구할 때 이 두 세계를 연결하는 작업이 반드시 필요하게 되는데, 칸트는 두 세계를 잇는 매개의 역할로 역사철학을 바라보게 된다.



흥미로운 건, 이 과정에서 칸트가 역사를 목적론적 행위의 총체로 바라보았다는 점이다. 흔히 역사적인 행위를 떠올려본다면, 원인과 결과가 연속되는 인과론적 관점을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에 따르면 역사는 A라는 사건이 원인이 되어 B라는 다른 사건이 일어나는 연속된 흐름일 것이다. 하지만 칸트는 자연의 의도와 계획이 인간 행위 속에 숨어들어 있기 때문에 인간 의지의 자유가 발현되는 과정을 개인이 아닌 인류의 차원에서 길게 바라보면, 지식과 감정들을 우리가 법칙에 따라 처리하듯이, 역사 속에 내재된 법칙과 목적을 발견할 수 있다고 바라본다.



여기서 역사의 목적을 상정할 때 칸트는 ‘인간의 소질은 자연에서 부여받아 타고 태어난 것’이라는 중요한 전제를 설정한다. 이 전제는 이상하게 들릴 수밖에 없다. 상식적으로는 자연이 인간에게 무언가를 부여하는 살아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칸트는 의인화한 자연을 존재하는 것들의 원천이자 존재자들의 체계로 보았으며, 동시에 자연 속의 모든 생명체에게 각기 다른 소질들을 부여하는 모체로 여겼다. 여기서 자연이 부여한 소질은 동시에 그 존재의 목적이 된다. 자연은 소질을 부여할 때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적당한 정도의 목적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칸트가 설정한 전제에서 자연이 부여해 준 결과로 타고 태어난 인간의 소질, 즉 다른 존재와 구별되어 인간만이 지니는 특별한 소질은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이성(理性)이다. 이성은 선험적 능력으로 자신의 성찰을 통해 이룩할 수 있는 비판과 자유의 원동력이 되는데, 특히 칸트는 인간이 이성을 사용하여 스스로 자유로운 존재로 살아가는 것을 자연의 의도로 보았다. 하지만 이성의 사용이 항상 긍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가지는 않는데, 특히 개인적 차원에서의 이성의 사용은 악한 결과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점이 이 사실을 증명한다. 따라서 칸트는 인간의 자연적 소질로서의 이성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를 인류(人類)차원에서 고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인간이 항상 선한 방식으로 이성을 사용하고자 하는가? 역사를 되돌아보면 이 질문에 동의하기 힘들 것이다. 단적으로 인간의 이기심이나 전쟁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인간의 선한 이성의 사용이 항상 적용된다고 보기 어렵다. 그렇다면 칸트는 자신의 주장과 모순되는 사례들을 어떻게 대응하고 있을까?

칸트는 이율배반적 성격의 한 명제(제4명제)로 이 모순을 쉽게 해결해낸다. 여기서 이율배반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전술(前述)한 이기심이나 전쟁과 같이, 인간이 스스로를 개별화하고 자신의 의도대로만 행위를 하며 타인에 대해 저항의 모습을 보이는 ‘반사회적인 사회성’이 인간을 나태함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면서 동시에 인간의 노력을 분발시키는, 더 나아가 궁극적으로는 인간이 지닌 소질(이성)의 계발을 촉진하게 한다는 칸트의 서술 때문이라 할 수 있겠다. 이에 따르면 전쟁 속에서 더 큰 선(善)이나 이성의 고차원적 계발을 얻을 수 있다는 의견이 타당하게 된다.

그렇다면 칸트는 모든 전쟁을 긍정하는가? 그렇지는 않다. 인간들 상호 간의 항쟁은 사회의 합법칙적 질서의 원인이 되는 조건하에서만 가능하다고 칸트는 역설한다. 다시 말하자면 전쟁은 필요악적 차원에서 요구되는 행위이다.

이율배반적 성격의 제4명제 이후에는 칸트가 보여주고자 하는 세계 시민과 보편사의 개념을 서서히 드러내고 있다. 그 두 개념을 본격적으로 다루기 이전에 칸트는, 제5명제와 제6명제를 통해 이성 계발 및 자유의 환경을 제공해 주는 시민 사회의 건설을 먼저 이야기하고 있다. 지배자 상정의 문제, 체제 본성에 대한 이해의 문제, 경험의 축적과 관련한 문제, 선한 의지가 요구되는 문제에 의해 시민 사회의 건설이 무척이나 어렵다는 점에도 불구하고, 시민 사회에 대한 언급이 선행된 이유로는 국제 관계 또한 국내적 차원의 시민 사회의 건설 양상과 비슷하다는 점과 시민 사회의 건설이 국제 관계와 서로 상당한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점을 언급할 수 있다.

시민 사회의 건설을 언급한 이후에 칸트는 보편사, 즉 세계 시민적 상태에 도달한 역사를 서술할 때 필요한 개념인 ‘세계 시민’을 본격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한다. 칸트에게 세계 시민이란, 각 국가들이 안전과 자유를 보장받기 위해 하나의 힘과 의지의 법칙으로 통일된 자발적 결합 체제 속에 살아가는 구성원을 의미한다. 세계 시민의 개념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칸트가 ‘단일한 국가’를 이상적인 형태로 바라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하나의 통일체는 각 국가들의 안전과 자유를 보장하는 역할일 뿐, 각 국가의 존재는 인정한다. 칸트가 단일한 국가를 이상적으로 생각하지 않은 이유는 단순하다. 바로 이율배반적인 명제라고 전술한 제4명제 때문이다. 반사회적 사회성이 없다면 인간이 지닌 이성의 발현 및 계발은 정지될 것이라고 예측하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



칸트는‘세계 시민적 관점에서 본 보편사의 이념’에서 인간의 이성을 자연이 부여한 소질이라고 본 전제를 기반으로 하여, 반사회적 사회성과 시민사회 그리고 세계 시민 및 보편사의 개념으로 자신의 역사철학의 범주를 발전시키고 있다. 이에 따라, 완전히 정당한 시민 정치 체제 및 국제 관계를 자연의 숨겨진 계획으로 보았고, 자유분방하게 보이는 인간 의지의 표출을 일반적인 형태의 자연의 법칙으로 설명하는 것을 역사로 규정하였다.

칸트가 역사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던질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질문은 ‘자유로운 인간 행위를 어떻게 자연의 법칙으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일 것이다. 이 질문은 역사를 목적론적으로 바라본 칸트의 시각 자체를 전면적으로 뒤흔드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칸트는 인간의 의지가 지닌 자유 그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다만 하나의 역사적 사건들에 초점을 두어 그것들을 재구성하는 작업은 역사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면서도 동시에 경험의 한계에 부딪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강조할 뿐이다. 이는 인과율에 따른 역사를 거부한 칸트의 입장과 일맥상통하는 대목이라 할 수 있겠다. 따라서 칸트는 역사를 개별적 사건의 인과적 흐름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관찰에 부여되는 선험적인 원리, 즉 이미 인간의 정신 안에 들어 있는 세계 시민으로 나아가려는 목적의 파악으로 보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칸트의 시도는 역사 속에서 의미를 찾아내려는 노력의 소산으로서도, 동시에 역사를 바라보는 특별한 관점을 제공했다는 점에서도 큰 의미가 있다.
최일우 2018-01-10 추천(0)
[존재와역사부문 우수작]사기
 


영화영상학과 4 이*원


 


 



  특히 역사를 오늘날을 성찰하게 해주는 ‘거울’로 보고, 교훈을 주는 교본으로 본다. 그러나 이는 역사가 시간의 흐름과 변화한 시선에 따라 매순간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는 사실은 보지 못했다. 즉, 역사는 고정되어 있는 딱딱한 물건, 혹은 ‘거울’만이 아니다. 살아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일종의 유기체다.흔히들 역사를 정의할 때 현재와 과거의 대화라는 E.H.카의 유명한 말을 인용하고는 한다.




사마천이 저술한 <사기>는 전 세계 많은 학생들이 읽는 교양서이다. 이 방대한 분량은 전설이라는 오제의 본기부터 시작해 후한 시대까지 이른다. 이 안에는 수많은 인물들과 사건이 담겨져 있다. 그런데 이 <사기>의 특징은 역사를 단순히 서술하는 게 아니라, 다양한 생각과 인물을 등장시키며 입체적으로 역사를 묘사하고 있다. 이 사마천의 방법론과 묘사 때문에 <사기>는 딱딱한 역사서가 아니라 인간을 생생하게 그려내는 대서사시가 된다. 또한 후대의 시선에 따라 끊임없이 재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준다.



<사기>는 본기, 표, 서가, 세가, 열전으로 구성돼있다. 본기는 제왕과 황제의 이야기로 총 12편이다. 표 10편은 연표로 세, 연, 월 등 시간 순서에 따라 사건과 인물을 서술한다. 서 8편은 국가 제도와 문물에 대한 전문적인 논문이다. 세가 30편은 제왕보다 낮은 위치에 있는 제후에 대한 기록이다. 제후 외에도 황제의 친척과 공이 큰 신하도 포함시켰다. 마지막 열전 70편은 신분을 초월한 ‘모든 인물’에 대한 이야기이다.

우리는 어렸을 적 교과서를 공부하며 역사란 왕과 왕조의 이야기, 지배자들의 이야기라는 고정관념을 가지게 된다. 사실 대부분의 역사서도 주로 정치의 측면만을 중심으로 다룬다. 언제 어느 왕이 어떤 나라를 세웠고, 어떤 지방을 정복하고 새로운 제도를 시행했다는 이야기 말이다. 그러나 역사란 실은 ‘인간’의 이야기가 아닌가? 사마천은 이 사실을 누구보다도 날카롭게 인지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 이전까지의 서술과는 전혀 다른 인간중심의 서술방식을 보여준다.



우선 8권의 서와 10권의 표를 제외한 112권이 모두 사람에 대한 기록이다. 이는 사마천의 인본주의 사상을 드러낸다. 사마천은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간다. 단순히 출신, 집안, 관직, 왕과의 사건만을 적지 않는다. 그 사람만의 인물상과 특성을 그려내기 적합하도록 선별한 다양한 일화를 그린다. 그리고 그 인물은 단순히 왕과 왕 주변인물로 한정하지 않는다. 도둑, 자객, 만담가, 건달, 도사, 남색가 까지 다양한 인간군상이 녹여져 있다. 그리고 당시 대세가 되는 유가 사상뿐만 아니라 음양가, 유가, 명가, 법가, 도가의 사상을 모두 담아냈다. 인간상과 인간이 믿고 행하는 모든 것을 담아내려고 한 것이다. 역사는 다양한 인간군상이 어우러져 펼쳐진다는 믿음을 서술로 보여줬다. 게다가 제왕과 황제의 이야기인 본기에 패자인 항우를 넣고, 여자였던 여후를 포함한다. 또한 세가에는 농민 반란을 일으켰던 진섭을 등장시켜 그 사람의 최후나 성별, 신분에 관계없이 개방적인 역사 서술을 사마천은 했다.

이처럼 인간중심으로 개방적이게 이야기를 쓰다 보니 역사가 생동감이 있으며, 다양한 시각으로 해석할 수 있게 해준다. 또한 독창적인 기법을 통해 인간이란 다양한 모습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 보여준다. 이 기법이 바로 ‘호견법’이다. 같은 인물이나 같은 사건을 여러 곳에 분산시켜 등장시킨다. 예를 들어 유방 본기를 읽다보면 한나라를 창업한 유방의 위대함과 역경을 이겨내는 유방의 능력 등 을 묘사한다. 그런데 항우본기를 읽다보면 유방이 도망가다가 자신의 목숨이 위험해지자 자신을 던지는 일화가 나온다. 이처럼 유방을 단순히 위대한 왕조의 시조라고만 칭송하지 않고, 그가 그 왕조를 세우기 위해 자식마저도 버릴 정도의 매정함을 동시에 이야기한다. 호견법을 통해 유방이라는 캐릭터가 가지는 다양한 성격과 모습을 독자가 상상하고 그려내게 한다. 여태후 역시 훌륭하게 나라를 다스려 나라는 풍요롭게 한 치적을 이야기한다. 동시에 그녀와 관련된 이야기가 곳곳에 등장하는데, 그녀가 유방의 첩에 대한 질투로 유방 사후 첩을 끔찍하게 살해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즉, 여후가 훌륭하게 나라를 다스린 군주이면서 동시에 질투에 휩싸인 개인으로의 모습도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란 다양한 성격과 모습이 교차하는 복잡하고 입체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이 서술방식은 설득력을 가진다.

사마천 또한 차가운 머리로 자료를 모으고 서술하는 역사가인 동시에 인간과 역사를 사랑하고 뜨겁게 바라보는 한 인간이었다. 역사가는 실제 있었던 과거를 기록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래서 사마천의 글을 읽다보면 그의 발품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실제 그는 문헌만 뒤진 게 아니라 직접 현장답사를 수십 차례 했다. 그리고 그는 이 객관적이고 엄정한 자료를 뜨거운 가슴을 서술했다. 그는 항상 서술의 말미에 ‘태사공(사마천)은 이렇게 말했다.’라며 자신의 견해와 논평을 거침없이 붙였다. 특히 당시에는 ‘천도’가 절대적인 윤리였음에도 백이와 숙제 열전에서 이에 의문을 토해낸다. ‘공평하고 바른 일이 아니면 떨쳐 일어나서 하지 않는데도 재앙을 만나는 사람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이런 사실은 나를 매우 당혹스럽게 한다. 만약에 이러한 것이 하늘의 도리라고 한다면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 그는 역사 속 인물들의 모습을 보고 자신의 감정을 거침없이 드러냈다. 이는 역사와 인간에 대한 애정과 관심에서 나온 결과였다. 위의 서술처럼 사마천의 역사 서술은 철저히 인간중심적이었다. 그렇기에 다양한 인간 군상을 개방적으로 담아냈고, 그의 글쓰기는 문학적이었다. 서두에 말한 것처럼 역사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끊임없이 다시 평가받고 재해석된다. 그게 유기체인 역사의 본질이다. 사마천은 이를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인물과 사건을 당시의 시각뿐만 아니라 다양한 시각을 담았다. 그리고 해석의 여지를 내용과 기법, 형식으로 남겨뒀다. 그래서 지금껏 긴 세월의 역사가 흐르면서 <사기>는 끊임없이 읽히고 있다.

사마천과 <사기>는 이런 입체적인 역사와 인간의 본질을 너무도 빨리 깨달은 바람에 오랫동안 유학에서 비판을 받아왔다. 황제와 영웅들의 인간적인 모습을 그린 것, 나라를 배반한 역적을 등장시킨 것, 여성을 본기에 등장시킨 것, 시정잡배와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려낸 것, 유교적 세계의 중심인 천도에 대해 역사적 통찰을 바탕으로 의문을 제기한 것, 영리추구를 적극 권장한 것(화식열전에서 그는 공정성이 보장된 상태에서 개인의 영리추구는 전체의 부를 증대시킬 거라고 역설한다.) 등. 특히나 민중의 뜻을 거스를 경우 군주의 명이라 할지라도 받아들이지 않는 인물들을 <유협열전>에서 소개하며 당시 지배자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사기>의 시각은 놀랍도록 현대적이며, 현대뿐만 아니라 어떤 시대의 누구에게나 본질적인 깨달음과 시각을 선사해준다. 시대가 달라져도 <사기>가 끊임없이 읽힐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한 가지 이데올로기를 대변하기 위해 역사를 서술한 게 아니라, 인간의 다양한 살아 숨 쉬는 모습을 그려냈기 때문이다. 결국 사기가 역사를 뛰어넘어 던지는 핵심 의미는 과연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이다. 하늘의 도를 묻는 백이열전에서 말했듯, 절개와 의리를 지키며 산 백이와 숙제는 굶어죽은 반면 포악한 도척은 천수를 누리고 행복하게 살았다. 물론 후대의 평가는 정반대가 되었지만, 죽은 이후의 명성을 생각하며 산다는 것이 과연 쉬울까? 그리고 과연 백이와 숙제는 는 죽은 이후의 삶을 위해 그렇게 한 것인가? 그가 저작한 《사기》의 사례뿐만 아니라 처참한 오욕을 견디고 후세에 이름을 남긴 사마천의 삶 자체가 이런 질문에 대해 사유하게 만든다.

현대 사회의 복잡성은 증대하고 변화는 빠르다 못해 질주한다. 이 고전은 답을 강요하지 않고 다양한 인간군상과 사회를 제시함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 독자 스스로 답을 하게 만든다. 인문학, 교양이 요구하는 성찰적 인간상을 가능하게 해주는 최고의 고전 중 하나이다. 인간관계, 출세, 처세, 리더의 자질, 도덕과 윤리, 사회와 인간의 관계 등 《사기》가 제기하는 질문 들은 여전히 유효하다. 이러한 질문을 문학과 역사의 만남을 통해 무엇보다도 재밌게 전달한다.



오늘날 역사학은 큰 위기를 맞았다. 랑케는 오직 사실만을 기록하는 것이 역사가의 의무라고 했다. 그러나 극적인 삶 외에도 사마천의 문학적이고 당위적 –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 이며 입체적인 서술방식은 역사학을 부활시킬 수 있는 방식이다. 역사가는 과거 사실을 찾고 기록만 하는 자가 아니다. 오늘날의 시각으로 그것을 해석하여 오늘날의 사람들과 소통해야 하는 자들이다. 이런 역사가의 새로운 역할은 사마천의 식견으로부터 유추할 수 있다.






 

최일우 2018-01-10 추천(0)
[존재와역사부문 우수작]명심보감
 우리는 왜 명심보감을 읽어야하는가?

 


국어국문문예창작학부 4 최*슬

 

   <명심보감>은 고려 충렬 왕 때 추적이 어린이들의 학습을 위하여 중국 고전에서 서현들의 금언, 명구를 편집하여 만든 책이다. 서현들의 금언, 명구를 총망라한 책인 만큼 도서의 이름이라기보다, 윤리나 도덕의 집합체 그 자체로서 우리들의 인식 속에 자리 잡고 있다. 따라서 2017년도 대한민국의 대학생들이라면 누구라도 그 이름을 익히 들어왔을 것이다. 아주 어렸을 적부터 말이다. 그렇다면 실질적으로 <명심보감>을 읽은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나의 경우만 해도 수업과정 안에 포함되었다는 특수한 상황을 제외하고서 단 한 번도 <명심보감>을 읽어본 적이 없다. 그러나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명심보감>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아니, 읽지 않은 사람이라도 같은 생각을 하게 되리라고 짐작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너무나도 익숙한, 그래서 뻔한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도덕 윤리에 관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부모에게서 들어왔던 규칙들이 그러하며, 학교에서 학습한 질서들이 그러하다. 공자가 “선한 일을 하는 자는 하늘이 복으로써 갚아주고, 악한 일을 하는 자는 하늘이 재앙으로써 갚아주느니라.”라고 말한 것과 태공이 “선한 일을 보거든 목마를 때 물을 본 듯이 하고, 악한 일을 듣거든 귀먹은 것처럼 하라.”라고 한 것은 결국 나쁜 일은 하지 말고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지금까지 우리에게 이러한 도덕윤리를 가르쳤던 부모나 형제, 친인척 또는 선생님 등 수많은 사람들 모두에게 선현의 피가 흐른다고 볼 수 있겠다. 그렇다면 2017년의 대학생인 우리가, 우리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선현들에게서 가르침을 받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명심보감>이라는 책을 읽어야만 하는 이유가 있을까? 묻지 않을 수 없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이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 먼저 왜 책을 읽는 지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한다. 문학은 자기 탐구를 위해 읽고, 자기계발서는 자기계발을 위한 지식을 얻기 위해 읽는다. 전공서적은 학문 탐구를 위해 읽으며 백과사전은 필요한 지식을 선별적으로 습득하기 위해 읽는다. 어떠한 책이든 무언가를 ‘얻는다’는 관점에서 볼 때 그 의미가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우리가 <명심보감>을 읽는 것도 지식이 되었건, 자기 탐구가 되었건 무언가 ‘얻는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직설적으로 말해서 책이 담고 있는 것들이 이미 우리가 체득했던 것들이라면, 우리는 그 책을 읽을 필요가 없게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명심보감>의 선현들이 말했던 금언과 명구에 대해 우리는 이미 그 내용과 의미들을 모두 알고 있기 때문에 <명심보감>을 읽을 필요가 없다고 할 수 있다.



도식적으로 이는 논리적인 귀결이라고 할 수 있지만 나는 이러한 맥락과 다른 관점에서 <명심보감>을 읽어야 하는 이유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것은 <명심보감>이 이를 테면 건축에서의 ‘설계도’와 같다는 것이다. 건물을 지을 때 기둥을 세우고, 시멘트를 바르고 벽돌을 쌓는 것보다 먼저 이루어져야 하는 작업은 설계이다. 어떤 건물도 설계도 없이는 지을 수 없으며, 만약 이를 어길시 그 건물은 필히 무너지고 만다. 우리가 부모에게서, 선생님에게서, 친구에게서 가르침 받아왔던 수많은 도덕윤리들은 사실은 그 뿌리가 <명심보감> 속 선현들의 말씀에 있다. 아까 잠깐 ‘피가 흐른’다고 언급했던 것처럼 우리는 뿌리에서 파생된 수많은 가지들 중 하나인 것이다. 나에게 권선징악이라는 도덕윤리가 내재된 것을 단순히 나의 부모가 그렇게 가르쳤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나를 가르친 우리의 부모는 어떤 선현의 가지이며 나를 다독인 친구 역시 또 다른 선현의 가지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에서 더 나아가면 우리가 쉽게 저지르는 오류들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장자와 공자는 위대한 인물이라고 생각하지만, 때때로 부모나 선생님, 친구는 쉽게 무시한다. 전공서적이나 자기계발서는 필독하지만 고전이나 고서들은 읽지 않는다. 이렇듯 우리는 아주 개인적으로,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 것들에만 집중하는 오류를 범한다. 사실은 그것들은 모두 하나의 뿌리에서 나온 것들이며 한 장의 설계도에서 비롯된 건물이라는 진실을 망각하는 것이다. 나를 만든 것은 생물학적으로는 부모이지만 결국 나의 존재는 수도 없이 많은 선현들을 거쳐 탄생했다는 점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어떤 건물을 볼 때 우리는 건물의 안팎으로 그것들의 외형에만 집중한다. 사실 직업적으로 건축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건물을 보고 설계도를 생각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건물은 언제나 설계를 지탱하고 있다.



나는 이것이 <명심보감>을 읽어야 하는 충분한 이유가 된다고 생각한다. 내 친구와 내가, 나의 부모와 내가 사실은 아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누군가와의 사소한 차이를, 절대 좁힐 수 없는 간극으로 생각하지 않게 된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이기주의와 경쟁주의, 물질만능주의, 세대 간 갈등 등 추상적이고 아득하지만 이것들은 실질적 고통이 되어 우리를 옭아매고 있다. 타인을 시기하면서 남의 불행으로부터 행복을 얻고, 자신의 환경을 비관하고 누군가를 원망하는 바로 그 고통 말이다. 그것들 속에서 해방되는 길은, 적어도 현재 2017년의 대학생인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사실은 우리가 모두 같은 뿌리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을 기억하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명심보감>을 통해 나를 지탱하고 있는 뿌리에 대해 설명할 수 있으며 나의 줄기를 되돌아볼 수 있다. 나를 기초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 끊임없이 탐구하고 생각하는 방법이야말로 <명심보감>을 읽어서 ‘얻을 수 있는’ 것들이며, 2017년의 대학생인 우리가 후대에 전해줄 수 있는 또 하나의 <명심보감>이 될 것이다.


 
최일우 2017-12-19 추천(0)
[지혜와자비부문 우수작]싯다르타




 


경영학부  2년 김*식




시간을 뛰어넘어 통하는 싯다르타의 사랑

−싯다르타를 읽고−



‘진정한 사랑은 없다‘라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정보화 시대가 된 오늘 날, 남성성과 여성성의 경계가 희미해지며 옛날보다 수많은 사람들이 더 많은 종류의 사랑을 한다. 그러나 그들 중 진정한 사랑을 하는 남녀가 얼마나 될까? 사랑의 발생 횟수와 종류가 많아질수록 오히려 사랑의 깊이는 감소하는 것 같았다. 사랑에 대해 이런저런 고민을 할 무렵, 대학에 들어와 소설 ’싯다르타‘를 읽었다.

“사랑하고 사랑 받는 것은 양 쪽에서 태양을 느끼는 것이다.”

사랑에 대해 가장 강렬하게 표현한 문구가 아닌가 싶다. ‘싯다르타’를 읽으며 경청, 자비, 깨달음, 단일성 등의 많은 주제어가 생각났지만 책이 지녔던 가장 강력한 단어는 바로 사랑이었다. 싯다르타라는 한 인물의 일생에서 우리 모두의 보편적 사랑을 엿볼 수 있다. 여기 싯다르타의 다양한 종류의 사랑을 경험을 보면서 시간을 뛰어넘어 통한는 진정한 사랑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첫째로 싯다르타와 고빈다의 사랑이다. 우정을 사랑이라는 범주 안에 넣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나는 단호하게 긍정 할 수 있다. 우정과 사랑 모두 서로를 위하고 생각하는 마음에서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책속의 싯다르타와 고빈다는 평생에 걸친 우정으로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준다. 어렸을 적 싯다르타의 품성에 반한 고빈다는 그의 뜻에 함께하기 위해 부귀영화를 버리고 그와 함께 사마나가 되었다. 이는 단지 우정만이 아니라 싯다르타에게 감화된 것 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행 중 서로를 가장 많이 이해했다는 점에서 그들의 우정은 대단하다. 싯다르타에 대한 고빈다는“만약 싯다르타가 언젠가 성불(成佛)하게 된다면, 고빈다는 그의 친구로서, 그의 동반자로서, 하인으로서, 창(椙)을 들어 주는 시종으로서, 그림자로서 그를 따르려고 했다.”라고 하면서 죽음까지도 함께 감수하겠다는 묘사에, 책을 읽는 나는 싯다르타가 매우 부러웠다. 평생의 친구는 나 스스로도 계속 염원해 왔던 바이며 아직 찾지 못한 보물이기 때문이다. 또한 변치 않는 마음을 최후까지 공유하는 두 사람의 자세에 깊은 감명받았다.

두번째로 싯다르타와 바수데바의 사랑이다. 고빈다가 친구 싯다르타에게 영감을 받았듯, 싯다르타는 스승 바수데바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바수데바를 스승이라고 칭하는 것에 대해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 바수데바는 싯다르타에게 아무런 가르침도 주지 않았다고 말이다. 그러나 바수데바는 싯다르타의 영혼의 스승이다. 바수데바를 만나지 못했다면 싯다르타는 결코 궁극적 깨달음을 얻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직접 말하고 전하는 것만이 가르침이 아니다. 싯다르타는 분명 바수데바에게 배웠다. 옴의 소리를 듣는 법을 말이다.

‘삼라만상(森羅萬象)의 모든 소리들이 그 강물 소리에 들어 있지요.’

내가 책을 읽고 가장 많은 생각을 들게 했던 부분이 바로 강의 목소리, 옴이었다. 책은 단일성, 변화, 윤회 등의 단어를 활용해 옴의 소리를 표현하려고 한다. 그러나 내가 읽고 해석한 옴은 바로 사랑이다. 강의 소리는 자신을 사랑하고, 주변을 사랑하는 방법 그 자체이다. 바수데바와 싯다르타 사이의 사랑이란 의미는 다른 사랑들과는 사뭇 다르다. 자연의 소리를 듣고 내면을 이해하는 법을 전승하는 바수데바의 가르침은 후에 싯다르타가 아들로 인해 겪은 번뇌를 해소 할 수 있게 해주었으며 카말라와의 최후의 만남을 더욱 의미 있게 만들어 주었다.

신념의 길을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가늠할 수는 없지만 사랑이 담긴 충고가 싯다르타에게 매우 큰 영향을 주었음은 틀림없다. 20여년이 지나 싯다르타는 자신이 가장 감명 깊게 보았던 장소와 인물에게로 돌아온다. 그것은 아마 친구와의 우정이며 제자와의 정이며 싯다르타의 깨달음에서 오는 그 자신의 기쁨일 것이다.

세 번째로 싯다르타와 카말라의 사랑이다. 카말라는 싯다르타를 열렬히 사랑한다. 그렇다면 싯다르타는 카말라를 사랑했는가? 바수데바가 싯다르타의 스승이었는지에 대한 견해와 마찬가지로 싯다르타와 카말라의 관계가 과연 사랑이었는지 의문점을 제시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관계는 단순한 탐욕이 아닌 이해의 관계로 이루어져 있다. 싯다르타가 카말라를 사랑했는가에 대한 나의 대답은 ‘그렇다’이다.

책 싯다르타에서 연애요소가 들어가 있는 특징 하나 만으로도 주인공 싯다르타가 카말라와의 사랑에 대해 고뇌하는 부분은 이상적이었다. 그러나 싯다르타는 달랐다. 물론 경지에 오르기 위한 발판 중 하나로 사랑을 겪은 것은 맞다. 그러나 싯다르타에게 사랑이란 장애물이 아닌 깨달음의 한 조각이었다. 그러나 열렬하고 진중한 사랑을 하고도 카말라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싯다르타를 대변하자면, 그건 싯다르타의 신념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사랑은 그들을 움직이게 하는 한층 강력한 율법이다.’에서와 같이 가장 큰 사랑으로 가장 큰 깨달음을 얻고, 큰 깨달음은 싯다르타로 하여금 자신의 위대한 신념과 신앙을 따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주었다. 설령 그것이 사랑하는 사람을 남겨두고 떠나는 일이라 할지라도, 그는 자신의 신념을 따라갔다. 카말라와의 사랑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싯다르타에게 카말라를 떠나는 것은 분명 살이 뭉게지는 고통이며 뼈가 부서지는 아픔이었을 것이다. 그 정도로 가슴 깊이 카말라를 사랑했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에 더욱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이 바로 신념이었던 것이다. 싯다르타와 카말라의 사랑은 적어도 한사람의 인생을 바뀌었다고 말할 수 있다.

네 번째로 싯다르타와 그 아들의 사랑이다. 싯다르타에게는 아이가 있다. 작은 싯다르타다. 사랑하는 카말라를 잃고 만난 아들은 싯다르타에게 매우 무례하다. 사랑은커녕 오히려 원망했다. 자신의 터전을 잃고 맞지 않는 신념을 강요하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있어서는 원망스러웠을 수도 있다. ‘사랑에도 카르마가 있다는 사실을 이 프로젝트 중에도 몇 번이나 확인 할 수 있었다.(중략)매순간 선택에 의해 삶이 결정되고 우리는 그 행위의 결과가 돌고 도는 윤회의 수레바퀴 아래 놓여 있다.’

이 구절에서 작은 싯다르타의 이와 같은 행보로 인해 생긴 싯다르타의 불행이 싯다르타의 업에서 비롯하였다고 느꼈다. 사랑하는 이와 끝까지 같이 있어주지 못한 업 말이다. 싯다르타는 자신에게 찾아온 최대의 불행에 현대인과는 다른 행동을 한다. 심한 말로 모욕하며 아버지의 품을 벗어날려는 아들에게 아버지 싯다르타는 인내의 과정을 거친다. 모든 고행을 견뎌내고 항상 웃는 얼굴로 아들을 대하는 싯다르타의 힘은 바로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의 사랑에서 야기했다.

‘출가하여 한 번도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 아들을 아직까지 기다리는 아버지의 슬픈 얼굴을 강물을 통해 바라본다.’

그 고통이 있었기에 싯다르타는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고, 집을 나오기 직전 자신의 아버지의 마음 또한 이해 할 수 있었다. 부모가 되어서야 부모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교훈은 싯다르타뿐만 아니라 나 자신에게도 와 닿았는데, 내 의문에 대한 부모님의 또 다른 대답이 ‘부모가 되어 보아라’였기 때문이다. 저 멀리 타국 작가의 타국 사상에 관한 책에서의 교훈이, 여기 나의 부모님이 주신 의미와 일맥상통한다는 점이 부모의 내리사랑의 위대함을 잘 느끼게 해주었다.

싯다르타의 일생은 수많은 사랑의 과정으로 덮여 있다. 사랑의 공통점은 서로를 이해한다는 점이다. 어떠한 사랑이든 이해의 과정은 불가피하다. 자기애는 자기 자신과의 이해가 필요하며 저 멀리 타국의 모르는 빈민 아이에게 구원 물자를 보낼 때 느끼는 사랑 또한 인류와의 이해를 필요로 한다. 진정한 이해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진정한 사랑을 이룩할 수 없고 깨달음도 없다.

왜 우리는 사랑을 하게 만들어진 것일까? 사랑이 없는 세상은 아마 무채색이었을 것이다. 사랑을 하지 않는 삶은 결코 빛날 수 없다. 책 싯다르타에서 그의 사랑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사랑의 의미를 다각도로 가장 확실하게 전달하는 동시에 더 깊은 사랑의 의미에 대해 여운을 남기는 책임이 틀림없으며, 시간을 뛰어넘어 오늘날까지 통하는 진정한 사랑이라 생각한다.
최일우 2017-12-19 추천(0)
[지혜와자비부문 우수작]작은 것이 아름답다




경영학부 2년 황*영 



 

  책의 표지를 보면, 이렇게 쓰여있다. ‘작은 것은 자유롭고 창조적이고 효과적이며 편하고 즐겁고 영원하다.’ 그렇다. 이 책은 작은 것의 아름다움과 자유로움에 대하여 말한다. 작은 것의 아름다움을 왜 말할까? 그것은 우리가 크고 많은 것만을 찾기 때문이지 않을까?

우리는 크고 많은 것을 왜 바랄까? 그것은 우리의 욕심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우리의 더 많이 가지고 싶어 하는 욕심 때문에 우리는 더 크고 많은 것을 만들어 내는 기술을 발명하고 그것을 더욱 큰 효과가 나도록 노력한다. 이 책에서 슈마허는 이러한 우리의 욕심과 현대 사회를 비판하며 우리가 추구하는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싶어 하는 인간 중심의 기술로 인한 문제점에 대하여 말한다. 이 책은 슈마허가 1973년에 발간하였다. 알다시피 이 시기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우리에게는 물질적 풍요가 이루어지기 시작하고 베이비붐 세대의 탄생을 세상에 알리기 시작한 시기이다. 당시 사람들은 많은 식량과 많은 물품이 필요했으며 그들에게는 그 수요를 맞출 수 있는 생산을 위한 기술이 필요했다. 그러한 기술은 승전국을 중심으로 발명되었고 당시 사람들에게 필요한 만큼의 물품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생산을 하게 하여 필요를 위한 풍족이 아닌 불필요한 양까지 과잉생산을 하게 만들었다.

이에 이러한 기술이 우리에게만 악영향을 주는 것이 아닌 자연과 다음 세대에게 영향을 준다고 주장한 자가 바로 이 책의 저자 슈마허다. 이 시기에는 환경과 다음세 대를 생각하는 그의 의견이 크게 반응을 얻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슈마허가 비판하는 인간 중심의 기술이 당시에는 살아남는 데 필요한 기술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슈마허는 어떤 문제점이 있기에 그 당시에 필요한 기술을 비판하였던 것일까? 그리고 그의 해결책은 무엇인가?

슈마허는 그 당시의 생산을 경제 성장의 목적이 아니라 인간을 좀 더 행복하고 더 많이 소비시키는 수단이 되어버렸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생산을 통해 인간은 이러한 생산과 소비의 이용 주체가 아니라 객체가 되어버린 주객전도 현상이 일어난다고 한다. 이러한 결과로 인간은 기술의 주인이 아니라 노예가 된다는 것이다. 어느새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진 기술이 인간의 주인이 된 것이다. 이를 슈마허는 비판하고 해결하자고 주장한다. 그의 해결책은 인간 자신의 행복을 위한 통제 가능한 작은 양을 생산하여 자연과 공존을 해나가자는 것이다. 해결책의 개념으로 메타경제학과 중간기술이 등장한다. 이를 차근차근 이해하기 위해 책의 내용에 대하여 언급해보겠다.

책의 1부는 근대세계에 대한 이야기이다. 앞에 언급했던 것과 같이 근대 세계는 생산의 문제를 가지고 있다. 생산은 경제학 측면에서 본다면 규모의 경제를 가진다. 크면 클수록 더 많은 것을 생산해낸다는 것이다. 하지만 규모의 경제는 결국 경쟁을 위해 제 살을 깎는 행동을 낳는다. 또한, 규모의 경제는 과잉생산을 위해 과잉으로 원료를 사용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연을 생산을 위한 자본이 아닌 소득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연을 소득으로 생각하고 미래에 그와 같은 자연의 원료가 있다는 생각을 하여 우리는 자원을 최대한 사용한다. 그리하여 1부에서 슈마허가 제시한 내용이 ‘메타경제학’이다. 이는 불교 경제학이라고도 불린다. 불교에서 사용되는 순환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인간과 자연에 긍정적으로 순환되는 생산하는 것을 메타경제학이라고 한다. 이를 슈마허는 대량생산이 아닌 대중에 의한 생산이라고 한다. 이러한 근대세계의 대량생산을 책의 1부에서 비판한 것이다.

책의 2부는 이러한 메타경제학에 필요한 자원과 메타경제학을 위해 필요한 자원에 대하여 말을 한다. 그것은 우수한 교육, 적절한 토지이용, 산업자원 그리고 인간의 얼굴을 한 기술이다. 그는 가장 중요하며 무한히 사용할 수 있는 자원을 교육이라고 한다. 교육은 노하우(know how)를 전달하여 다음 세대에 더 많은 이득이 되는 무한한 자원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 당시처럼 반형이상학적 문제가 지속해서 대두된다면 교육은 최대의 자원이 아닌 최고의 것이 부패한 최악의 자원이 될 것이라고 한다. 또한, 토지의 적절한 토지이용에 대하여 이야기를 한다. 슈마허는 인간이 농업이 없이는 살 수 없다며 산업만이 아닌 농업과 산업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그리고 산업자원이 사라질 자원이라고 언급하며 그것이 사라지기 전에 원유 등의 수명을 연장해야 한다고 말한다. 2부의 마지막으로 인간의 얼굴을 한 기술을 언급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기술은 대중을 위한 생산을 만드는 기술이 되어야 하며, 인간의 얼굴을 한 기술(인간의 실제 크기에 맞게 작게 만드는 기술)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책의 2부에는 이러한 메타경제학에 필요한 자원에 대하여 말한다.

이러한 2부의 필요한 자원을 통하여 메타경제학을 적용할 수 있는 곳을 책의 3부에서 언급한다. 그는 제 3세계를 선진국과 다른 이중세계로 언급한다. 풍요롭지 못하고 자원이 부족한 제 3세계에 메타경제학을 통해 같이 상생해나가기를 바라는 것이다. 제 3세계에 일어나는 사회경제적 문제를 선진국의 중간기술 지원을 통하여 해결해나가자고 한다. 또한, 중간기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무한한 자원인 교육이라는 것이다. 최상의 원조는 지식 원조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제 3세계였던 인도를 예로 들어 그들이 직면한 실업 문제를 중간기술과 지식 원조로 해결하자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책의 3부에서는 중간기술과 지식 원조를 통해 제 3세계의 문제 해결에 대해 초점을 맞추고 있다.

책의 마지막인 4부에서는 현재의 조직과 소유권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방향에 대하여 언급한다. 기업의 소유방식을 새롭게 확립하자고 슈마허는 주장한다. 그 새로운 소유방식은 공공기관들이 민간기업의 지분 50%를 소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사회경제적 문제인 불평등과 양극화 등을 해결할 수 있다고 한다. 불평등과 양극화의 해결을 통해 우리는 더 좋은 사회를 만들어갈 수 있다고 그는 주장한다. 책의 4부에서는 메타경제학과 사회주의의 관점에서 조직과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 슈마허는 올림픽의 문구를 가져와 이런 말을 한다. “근대인에게 ‘좀 더 빠르게, 좀 더 높게, 좀 더 강하게’만큼 익숙한 단어는 없다.” 그렇다. 우리는 조금 더 남보다 빨라야 하고 조금 더 남보다 높고 조금 더 강해야 살아남는다. 그러기 위해 더 많은 것을 가지려고 하고 더 큰 것을 만들려고 한다. 하지만 모순적이게도 슈마허는 작은 것이 아름다우며 이 작은 것이 우리를 자유롭고 창조적으로 만들어 준다고 한다. 그는 불교적 관점과 사회주의적 관점에서 이러한 우리의 치열하고 부족함이 없어 보이지만 부족한 사회를 비판한다. 그리하여 이 책의 핵심이 작은 것이다. 작은 것은 적게 소비하는 것이고 적게 만드는 것이고 자연과 공존해 나가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과거에 주장되었지만, 현재에도 받아들여지고 미래에도 지속해서 언급될 것이다.
최일우 2017-12-19 추천(0)
[지혜와자비부문 최우수작] 싯다르타
영어영문학과  4년 김*수    

 



  ‘유리멘탈.’ 최근 들어, 방송에서건 신문에서건 한 번 쯤은 들어봤을 단어이다. 그리고 “되게 유리멘탈이시네요.”라는 말을 들었을 때, 우리는 썩 기분이 좋지만은 않다. 그것은 아마도 이 단어가 부정적인 뜻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국어사전에 의하면, 유리멘탈은 유리처럼 깨지기 쉬운 멘탈을 뜻한다. 그리고 우리는 남들보다 잘 울고, 잘 삐지고, 걱정이 많고 두려움을 가득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외친다. “유리멘탈이시네요.”

나는 싯다르타 역시 유리멘탈을, 모든 사람들이 들으면 기분 나빠할 그런 단어를, 가진 부처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불자들께서, 이것은 불교를 창시한 성자 싯다르타를 모욕하는 일이라고 말씀하실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당당하게 이야기한다. “싯다르타는 유리멘탈이에요.”

앞서 말했듯이 우리는 흔히, 유리처럼 산산조각 나고 깨지기 쉬운 정신을 유리멘탈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정말 유리가 깨지기 쉬울까? 용광로에서 펄펄 끓는 온도를 견디어냈다가 모든 것을 얼려 버릴 만큼 차가운 온도에서 급속 냉각을 시키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유리는 스스로 유리를 만들어간다. 웬만큼 단단하고 웬만큼 튼튼하지 않으면 이 과정이 주는 압력을 견디지 못할 것이다.

또한 유리는 취성이 강한 물질 중 하나이다. 유리는 10크기의 압력이 주어지지 않는 이상, 절대 그 모양을 잃지 않는다. 구부러지지도, 휘어지지도, 으스러지지도 않으며 그 모양 그대로 압력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이것이 견딜 수 있는 최대치의 크기인 압력 10이 주어졌을 때, 이것은 올곧았던 모양을 자르듯이 반으로 잘려나가게 된다. 1부터 한계치인 10만큼의 압력을 순서대로 가할 때, 압력에 저항하며 꼬리 내리는 다른 물질들에 비해 유리는 한없이 본연의 상태 그대로를 유지할 수 있을 만큼 올곧고 단단하다.

  심지어 유리는 무언가를 비추어볼 수도 있다. 소개팅에 나가기 전, 밥 먹고 난 뒤 치장을 위해 겉모습을 다듬을 수 있는 도구가 된다. 하지만 때론, 유리는 내면을 비추어볼 수 있는 거울이 되기도 한다. 내면을 아름답고 건강하게 만들기 위해 지금 내가 가진 문제점을 짚어보고 앞으로의 방향을 설정하는데 유리는 필수품이 된다.

  유리가 가진 상징적 의미보다는 유리라는 물질 그 자체로 파악했을 때의 유리는 단단하기 그지없는 물질이다. 창밖의 비바람을 막아주는 것도 유리이고 심지어 대통령을 경호하는 차창도 유리이다. 누가 유리를 깨지기 쉬운 물질이라 했던가. 우리는 유리에 대해 많은 편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선입견 때문에 만들어진 대표적인 예가, ‘유리멘탈’이라는 단어이다. 유리처럼 단단한 멘탈을 가진 사람에게 쓰이지 못하고 깨지기 쉬운 존재가 되어버렸을 때, 이 단어는 많은 모순을 내포한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 이 모순들을 산산조각내고, 이 단어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것이다. 그리고 내가 싯다르타의 어떤 모습에서 그를 유리멘탈이라고 부르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도 차근차근 살펴볼 것이다. 하나의 유리가 탄생하는 과정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극심한 온도차와 수만 번의 칼질과 내려침을 이겨냈을 때 비로소 유리라는 물질로 불리어진다.

싯다르타 역시 그랬다. 해탈을 얻기 위하여 싯다르타는 아버지를 버려야 했으며 친구를 버려야 했다. 또한 그는 아무 것도 없이 출가하여야 했으며 하루에 한 끼밖에 먹지 못하며 고행을 견뎌내야 했고 쉼 없이 깨달음을 갈구하여야만 했다. 이것은 오로지 그가 선택한 길이였다. 즉, 스스로 유리가 되기 위하여 용광로에 몸을 담갔다가 차갑게 만들기도 했던 것이다. 싯다르타가 해탈이라는 목표에 전념하기 위하여 스스로 취한 행동이었으며 스스로 이겨낸 칼질이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유리와 싯다르타는 유사성을 지닌다. 유리가 되기 위하여 고통을 견뎌내야 하듯이 싯다르타 역시 부처의 마음을 얻기 위해 여러 번의 시련을 겪었다. 이 과정을 통해 참을성과 인내를 배웠다. 유리는 10이상의 압력을 견딜 수 있을만한 튼튼함을 가지게 되었고 싯다르타는 단단한 정신력과 시련 속에서도 자신의 길을 정진하겠노라고 다짐하는 결단력을 배우게 되었다.

뜨거웠다 차가웠다 하는 과정의 반복을 이겨내고 만들어진 유리는 그만큼 튼튼할 수밖에 없다. 압력이 가해졌을 때, 휘어지거나 구부러지며 자신의 모습을 잃어가는 다른 물질들에게 마치, “그렇게 고집이 약해서 어따 쓸래.”라고 묻는 듯이 유리는 꼿꼿하기만 하다. 묵묵히 고통을 이겨내고 그 자체로서의 자리를 지키는 유리의 고집 있는 모습은 싯다르타와 꽤나 닮아있다.

  세존 고타마 이야기를 듣고 사문이 되겠다는 목표를 위하여 아버지, 어머니를 두고 출가하겠다는 의지를 밝혔을 때, 그의 아버지는 완곡하게 안 된다는 의사표시를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싯다르타는 포기하지 않았다. 책에서는 싯다르타의 고집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한 시간이 지나서 또다시 나와보고, 두 시간 지나서 또다시 나와보아도, 조그만 창 사이로, 싯다르타가 달빛 속에, 별빛 속에, 어둠 속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아버지는 꼼짝 않고 서 있는 아들을 보았다.”

  이처럼 아버지의 승낙을 받기 위해 싯다르타는 자신의 의지가 얼마나 결연한지 보여준다. 똑같은 자리에서 똑같은 자세로 하루 쯤 꼿꼿이 서 있는 것은 싯다르타가 사문이 되겠다는 목표를 포기하게 할 만한 큰 고난이 아니었던 것이다.

또한 싯다르타는 “아무 말 없이 가시덤불 속에 웅크리고 앉아 있기도 하였는데, 화끈거리는 살갗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져 내렸고 곪은 상처에서는 고름이 흘러내렸다. 더 이상 무언가가 찌른 듯이 아프지 않고, 더 이상 화끈거리지 않게 될 때까지 꼿꼿하게 꿈쩍도 하지 않고 한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라고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가르침을 얻겠다는 싯다르타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싯다르타가 가한 고통 중 일부에 불과했다. <싯다르타>에는 싯다르타가 해탈이라는 목표를 위해 행하고 견뎌낸 심리적, 육체적 고통들을 묘사하고 있는 부분이 많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싯다르타가 그 고통을 이겨내지 못해 좌절하고 포기했다는 모습을 묘사한 부분은 찾아낼 수 없다. 어쩌면 그만큼 싯다르타에게 있어서 해탈을 얻지 못하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일은 없었을지 모른다.

  시련에 저항하지 않는 자세로 해탈을 하겠다는 싯다르타의 끈질긴 고집은 나로 하여금 싯다르타가 유리의 본성을 많이 닮아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10만큼의, 한계치에 해당하는, 충격이 가해지지 않는 이상 올곧게 그 모양을 유지할 수 있을 만한 단단함. 그리고 주변에서 아무리 반대하고 말려도 저항 없이 굳건한 마음을 다잡는 고집. 싯다르타가 유리를 닮은 것인지, 유리가 싯다르타를 닮은 것인지 모를 만큼 그 둘은 참 많이도 닮아있다. 부처의 정신은 유리와도 같아 보고자하면 안을 볼 수 있다. 유리의 본질을 탐구하기 전, 사람들이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유리의 특징은 반사가 된다는 것이다. 유리는 또한 시나 소설에서는 상징적인 의미로 나오기도 한다. 문학작품에서 유리는, 사물 그 이상의 가치를 넘어, 스스로와 소통하는 소통수단이 되기도 하며 나를 반성해볼 수 있는 기회 제공자가 되기도 한다. 싯다르타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싯다르타여, 그 어리석음의 세월을 그토록 오랫동안 보낸 다음 네가 다시 한 번 한 가지 기발한 착상을 해냈으며, 대단한 일을 해냈으며, 너의 가슴속에 있는 새가 지저귀는 소리를 듣게 되고 그 새를 따랐다는 점에서 나는 너를 칭찬하노라!” 이것은 싯다르타가 세속적 생활을 하던 중, 갑자기 찾아온 회의감에 자신의 지난날을 반성할 때 했던 말이다. 그는 어째서 해탈에 전념하지 않고 시간을 무방비하게 흘려보냈다는 사실에 슬퍼한다. 하지만 그는 ‘가슴속에 있는 새가 지저귀는 소리를 듣게 되고’라는 표현을 씀으로써, 신의 내면을 바라보고 그것이 내는 소리에 집중함을 통해, 자신의 우매하고 황량하기 짝이 없는 생활에 종지부를 찍게 된다.

  우리는 때로 세상의 더러움과 추잡함에 맞서기 위해서는 세상을 정면으로 마주해야 한다고 말한다. 충분히 비켜 돌아서서 멀찌감치 나를 바라보는 것은 나의 발전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싯다르타 역시 그것을 종지부 찍기 위하여 물체로서의 거울은 없었지만 스스로의 내면을 비추어보았다. 싯다르타를 읽으며 싯다르타처럼 자아 성찰을 잘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을 정도로 그는 자신에게 엄격했다. 이쯤 되면 이 글을 읽은 많은 사람들이 유리멘탈의 정의를 다시 써야하지 않느냐고 앞 다투어 말할 것을 기대해본다. 유리와 멘탈이라는 단어가 합쳐진다면, 어떠한 시련에도 굴하지 않는 강인한 정신력을 소유한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나는 현재의 유리멘탈이라는 단어가 가진 모순에 이의를 제기하고, 새롭게 정의를 내리려 한다. 싯다르타가 보낸 일생은 어쩌면 범인들이 경험하기에는 너무도 먼 세상일지 모른다. 하지만 가까이 살펴보면 이것이 먼 나라 이웃나라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삶을 대하던 태도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사고방식의 근간이 되기 때문이다. 유리멘탈, 어쩌면 역설을 통해 싯다르타가 우리에게 더 강조하고 싶어 했던 교훈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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