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적인 인간이란 무엇인가
처음 든 생각은 ‘대단하다.’였다. 출판 이후 지금까지 끊임없이 회자되며, 명작이라는 수식어를 항상 달고 다니는 『멋진 신세계』는, 가히 그럴 만 했다. 책을 편 순간부터 덮는 순간까지 멋진 신세계의 ‘배양된 인간’이 되어, 야만인이 되어, 총재가 되어, 그리고 독자가, 올더스 헉슬리가 되어 수많은 사고의 폭풍을 경험했다.
포드 632년, 인간은 과학 발달의 혁신에 혁신을 거듭하여 마침내 인간까지 ‘대량생산’하는 세계에 살게 된다. 이렇게 ‘배양된 인간’은 으레 공장에서 제품을 찍어내는 것처럼 개인의 성격과 쓰임새, 취향, 지적 능력, 직업, 삶의 방향 등 시작부터 끝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정해진 인간으로 만들어지게 된다. 모든 인간은 ‘공동, 균등, 안전’이라는 세계 국가의 표어를 기준으로, 서로를 공유하고 질서와 안전을 유지하는 삶을 산다. 그들에게는 이것이 정상적인 삶이고 결혼 제도는 이해할 수 없는 것, 어머니에게서 태어나는 자식은 음탕한 것, 깊은 사고는 쓸모없으며 할 필요가 없는 것들이다. 모든 인간은 진정으로, 진심으로, 본능이 흡족한 행복을 느끼며 이들에겐 죽음조차도 두려운 것이 못 된다. 완벽한 행복, 완벽하게 안정적인 삶! 완벽한 세계이지 않은가?
그런데 우리는 이 세계에 쉽게 호감을 느끼지 못한다. 신세계에 감탄을 하면서도 계속해서 마음 속 깊은 곳에서의 거부감을 느낀다. 왜일까? 우리의 이러한 찝찝한 마음을 대변해주는 존재가 바로 야만인 ‘존’이다. 배양된 인간에게서 ‘태어난’ 존은, 야만인 보존구역에서 성인이 될 때까지 자라고 이후 신세계로 넘어가게 된다. 하지만 그가 상상했던 것과는 달리, 직접 마주한 신세계는 너무나 ‘비인간적인’ 세계이며 ‘인간의 존엄성’이란 찾아볼 수 없는 세계이다. 그는 이러한 신세계에 구역질을 느끼며 종래에는 스스로의 존엄성까지도 흔들림을 느끼고 목숨을 끊게 된다.
인간은 사유하는 존재이며, 고민하고 생각하여 선택할 권리가 있다. 인간은 불행과 고통을 느끼고 이를 통해 성장하며 생각의 깊이를 더하는 존재이다. 인간은 존엄하다. 이것이 야만인 존의 생각이며 또한 신세계에 거부감을 느끼는 우리의 생각이다. 스스로의 자유 의지로서가 아닌 만들어지는 인간이라면, 이는 기계와 다를 바 없다. 따라서 책 속의 ‘멋진 신세계’는 우리에게 전혀 멋지지 않다. 올더스 헉슬리는 완벽한 세계, 흔히 말하는 유토피아를 적나라하게 보여줌으로써 우리에게 인간으로서의 응당한 거부감을 불러일으키고, 우리가 바라 마지않는 유토피아의 위험성을 강렬하게 경고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나 스스로에게, 올더스 헉슬리에게, 그리고 야만인 존에게 묻고 싶다. 정말로 포드 기원으로 시작되는 이 신세계가 나쁜 것일까? 이 신세계가 멋지지 않다고, 유토피아가 아니라고 진정으로 확신할 수 있을까? 사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나는 이 질문에 ‘그렇다’라고 확실하게 말하지 못한다. 인간의 존엄성을 말하기 이전에, 인간이 느끼는 단순한 ‘행복’이라는 감정의 중요성 또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삶을 살면서 수많은 고민과 고통과 번뇌를 하며 살아간다. 끊임없는 감정의 홍수 속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행복과 불행을 느끼고, 삶이 고통스러울 때는 끝도 없는 절망 속에 빠지기도 한다. 우리의 삶은 절대 행복으로 가득 차 있지 않다. 남과 비교하여 자신을 깎아 내리기도 하고 가지지 못한 것에 집착하여 괴로움을 느낀다. 또한, 우리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누구나 예외 없이 늙고 병들어간다. 정신적인 괴로움은 둘째치더라도, 일차적으로 신체의 고통과 괴로움이 우리를 끊임없이 괴롭힌다. 젊고 활기찬 육체는 시간이 지나고 보면 그저 찰나의 순간과도 같다. 이처럼 인간의 삶 곳곳에는 불행을 느끼게 하는 것들이 너무나도 많다.
당장 주위를 둘러보아도 그렇다. 취업 걱정에 하루하루 스트레스 받는 친구들, 취업 이후엔 직장에서의 스트레스로 골머리를 썩는 직장인들, 자식 걱정에 잠 못 이루는 부모님들, 서로 경쟁하며 남을 헐뜯고 상처 주는 사람들, 몸과 마음이 병들어 그저 하루를 버티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힘든 사람들, 그리고 전 세계적으로 테러범들이나 범죄자들 또한 판을 치는 세상이다. 우리의 삶은 참으로 고행의 길과도 같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행복을 느끼는 것이 이렇게도 어려운 세상이라니, 무엇을 위해 이토록 치열하게 사는 것인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만약 우리에게 ‘멋진 신세계’가 펼쳐진다면 어떨까? 세상 모든 사람들이 평화롭고 질서를 지키며 안정된 삶을 사는 세계. 계급이 나뉘어져 있지만, 모든 사람이 자신의 계급을 진정으로 사랑하며 만족하는 세계. 고통과 불행은 존재하지 않으며 매일 매일 행복을 느끼고 쾌락을 즐기는 것이 보편적이고 옳은 세계. 다시 말해, 어느 누구도 삶을 비관하지 않으며 괴롭지 않은 ‘누구나 행복한, 멋진 신세계.’
매혹적이다. 매혹적이지 않을 수가 없다. 이가 썩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달콤한 사탕의 유혹에 흔들리는 아이처럼, 우리에게 이러한 멋진 신세계는 참으로 매혹적이다. 하지만 우리는 인간의 존엄성 앞에서 감히 이러한 세계를 옳다고 말할 수 없다. 인간답지 못한 삶이라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것 자체를 모르는 존재라면?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거나 우리와는 다르다면 어떨까?
그렇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우리는 인간의 존엄성과 사유하는 인간의 중요성을 알기 때문에 기계화되고 만들어진 인간을 거부한다. 하지만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는 세계라면 모든 인간이 행복한 세상을 거부할 이유가 없다. 혹은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개념이 쾌락을 추구하는 인간을 말하는 것이라면, 고통과 불행에서 벗어나 심지어는 죽음마저도 불행이 아니게 되는 삶에 한 발 내딛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신세계에서는 인간의 본능마저도 조작할 수 있다. 신체적 특징은 물론이고 계급별로 좋아하는 일이나, 취미, 심지어는 좋아하는 색상까지도 만들어낸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의 계급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만족감을 느끼도록 만들어진다. 그들의 본능은 사유하지 않고 쾌락을 즐기도록 조작되고 모든 것들이 멋진 신세계에 알맞게 만들어져서 살아가는 인간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의 삶을 진정으로 사랑한다. 진정으로 행복해한다. 과연 이들 앞에서도 신세계가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사유하는 인간,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며 살아가는 한 인간이 삶에 대한 괴로움으로 절망에 빠져있다. 그리고 만들어진 인간, 신세계에서 쾌락과 행복만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한 인간이 있다. 나는 감히 신세계의 인간이 부럽다고 말하고 싶다. 자신에게 사유하는 인간의 존엄성이 갖춰지지 않았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이 인간은, 진심을 다해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신세계는 참으로 멋지다. 그야말로 멋진 신세계이다.
사실 책 속에서 설정된 신세계가 틈 하나 없이 완벽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바퀴는 아니다. 레니나의 실수로 한 인간은 미래에 수면병을 얻게 될 것이고, 버나드같이 계급에 어울리지 않는 신체적 특징과 헬름홀츠같이 의구심을 가진 인간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만약 이런 예외성조차 없는, 그야말로 완벽하다고 말할 수 있는 멋진 신세계가 만들어진다면 나는 그 세계의 사람들을 정말로 행복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멋진 신세계에는 우리가 말하는 인간의 존엄성이 없다. 하지만 그 세계의 인간들에게는, 인간의 존엄성이 아닌 쾌락과 행복만을 추구하는 인간이 ‘인간적’이다. 지극히 인간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그들에게, 지극히 충만하다고 느끼는 그들에게, 우리는 과연 그들의 삶이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