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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
위대한 개츠비
저자
F. 스콧 피츠제럴드
발행처
문학동네
발행년도
2009
ISBN
9788954609173 

리뷰

박소연 2015-11-30 추천(0)
[북리뷰공모] 같으면서도 다른 두 사람의 결말
미국의 자본주의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을 꼽으라면 대표작은 ‘위대한 개츠비’와 ‘호밀밭의 파수꾼’이 될 것이다. 화려한 세계를 만들어낸 주인공이자 그곳의 중심인 제이 개츠비, 그리고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위선적인 세상에 환멸을 느끼는 홀든 콜필드. 두 작품은 각각의 인물을 통해서 미국의 두 가지 모습을 보여준다. 이 두 인물은 자세히 들여다보면 닮은 부분이 많다. 둘이 세상을 대하는 방식과 가슴 속에 품고 있는 희망은 상당히 유사하다. 그렇지만 그들이 맞이한 결말은 정반대다. 같은 것을 꿈꾸었던 사람들이 어찌하여 다른 결말을 맞이하게 된 걸까?

개츠비는 뉴욕의 각계각층의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정도로 유명 인사고 그가 개최하는 저택 파티는 말 그대로 ‘모든 사람’이 다 올 정도로 유명하다. 하지만 정작 파티의 주최자인 개츠비는 참여하지 않는다. 그가 만들어 놓은 세상이지만, 자신이 원하는 것이 나타나기 전까지 스스로를 세상에서 고립시킨다. 그러한 방식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지키는 모습은 콜필드와 유사하다. 콜필드 또한 그가 원하는 것을 찾을 수 없는 세상을 경멸하여 자신을 세상과 분리시킨다. 개츠비와 콜필드 둘 다 그들이 살아가고 있는 세계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기가 힘든들기 때문에 세상과의 고립이라는 방식을 선택한다. 그들이 자신들을 고립시키면서까지 지키고 싶으며 그러면서도 동시에 찾고 싶었던 것은 공통적으로 세상에 대한 희망이다.

‘위대한 개츠비’에서의 희망은 초록색 불빛이다. 초록색 불빛은 미국 사회에서 고유명사처럼 쓰일 정도로 유명한 표현이고 그것이 내포하는 바가 있다. 개츠비가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지키고 싶고 잡고 싶었던 그 희망, 그것이 바로 초록색 불빛이다. 그에게 희망은 세상을 살아가는 원동력이고 삶의 이유다. 그는 처음 저택을 사들인 순간부터 그 불빛을 바라보며 가슴 속에 간직한 희망을 매번 되새겼을 것이다. 언젠가는 저 불빛이 내 손에 잡혀 희망과 꿈으로만 그쳤던 것이 현실로 변하는 순간을 기다렸을 것이다.

콜필드 또한 호밀밭이라는 희망을 가슴 속에 품고 있다. 그 시대의 이기적인 미국 사회에서 개츠비와 콜필드처럼 희망을 꿈꾸며 살아가는 것은 드물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한 순수함이 다른 사람의 눈에는 어리석게 보였을 것이다. 그러한 시선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희망을 품고 있었지만 그 희망을 다루는 방식에서 개츠비와 콜필드의 차이가 드러난다. 개츠비는 자신의 순수함이 자랑스러웠고 자신의 희망에 대한 믿음이 있다. 하지만 콜필드는 순수함이 지속되지 못 할 것이라는 불안감이 더 컸기에 그것을 지킬 수 없다면 차라리 세상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그것이 바로 개츠비가 세상을 ‘만들어낸’ 사람이라면 콜필드는 세상을 ‘피하는’ 사람이 되어버린 이유다. 개츠비는 자신의 희망과 꿈을 욕심내지만 콜필드는 자신과 반하는 세상에 지쳐버려 순수함의 종말이 온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이러한 차이점이 다른 결말을 낳은 것이라 생각한다. 둘은 자신의 희망을 그들의 정체성에 투영하였다. 개츠비는 데이지를 자신의 여자로 만드는 것에 자신의 정체성을 걸었다. 하지만 개츠비의 지나친 자신감은 착각이 되고 진실을 통찰하지 못한다. 그의 오류는 그를 비극으로 이끌고 그의 정체성은 산산조각 난다. 반면, 콜필드는 순수함이 세상에서 밀려날수록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가고 방황하는 상태에서 시작한다. 하지만 오히려 그의 비관적이고 냉소적인 모습이 그를 안정적인 결말로 이끈다. 희망에 자신의 정체성을 걸었던 개츠비는 데이지라는 희망이 그를 배신하자 죽음으로 끝이 난다. 하지만 정체성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던 콜필드는 자신의 희망을 세상으로 끄집어내어 그것을 지키는 것으로 자신을 정의 내린다.

둘 중 누구의 방식이 올바르게 희망을 품고 살아간다고 얘기할 수는 없다. 그들은 각자 자신에게 필요한 방법을 선택했을 것이다. 후에 무너져내린다하더라도 개츠비는 자신의 삶의 중심이 되어 줄 것이 필요했을 것이고, 그렇게 싫어했던 세상이었지만 콜필드도 결국 자신이 할 일을 찾아서 세상으로 돌아갔다. 우리에게 희망은 어떤 것일까?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무엇인가 아니면 세상에서 벗어나고 싶게 만드는 무엇인가?
곽현주 2015-11-30 추천(0)
[북리뷰공모] 개츠비가 위대한 이유
신문방송학과 곽현주

- 개츠비가 위대한 이유 -

<위대한 개츠비>의 마지막 장을 덮자마자 든 생각은 역시 ‘개츠비는 위대하다’였다. 사실 자신의 ‘사랑’에 모든 걸 바친 개츠비를 완벽히 이해할 수는 없었고, 그가 때로는 답답하게 때로는 안타깝게 느껴지기도 했다. 이는 아마도 내가 생각하는 최고 가치가 개츠비처럼 ‘사랑’이 아니기에 그럴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내 마음 속에서 개츠비는 위대한 인물로 자리 잡았다. 그에겐 ‘평생토록 지킬 가치’가 있었고 ‘그를 위대하다 인정해준 닉’이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변하던 1920년대 뉴욕, 주가는 폭등했고 시내엔 마천루가 솟았으며 사람들은 미친 듯이 파티를 즐겼고 세상은 소용돌이쳤다. 이런 사회에서 사람들의 ‘마음’이야 안 변했으랴. 닉은 문학대신 채권을 공부했고 데이지는 개츠비대신 톰과 결혼했고 톰은 데이지대신 머틀(정부)과 사랑했다. 자신의 마음 하나 단단히 잡고 있기 힘든 세상이었다. 하지만 개츠비는 그 안에서 데이지를 향한 굳은 사랑을 보여준다. 그녀를 만난 순간 그의 삶에서 ‘사랑’이라는 가치가 가장 최우선이 되었으며 개츠비는 이를 평생토록 지킨 것이다. 죽을 때까지 “데이지…….”를 외칠 정도로 말이다.

이에 비해 나는 어떠한가. 그가 ‘사랑’이라는 가치를 지키려 애쓸 때 비록 그에게 공감하지는 못했지만 (위에도 썼듯이 난 사랑을 위해 인생을 바칠 사람이 되지 못한다) 막연한 부러움을 느꼈다. 아직 나에게는 개츠비의 ‘사랑’처럼 평생토록 지키고 싶은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우정? 사랑? 신뢰? 모두 중요한 가치지만 세상과 맞닥뜨리면 너무나 쉽게 지키고자 하는 의지를 꺾을 것 같다. 개츠비처럼 평생을 바쳐 소중히 지키고 싶은 가치-그것이 누군가에겐 어리석게 보일지라도-를 찾지 못한 자로서 이를 찾은 그가 위대하게 느껴졌다.

만약 평생토록 지킬 가치를 찾았다 해도 최종적으로 개츠비를 위대한 인물로 만든 것은 ‘닉’이다. 닉을 단순히 개츠비의 이웃, 친구라고만 표현하기엔 아쉽다. 닉은 개츠비의 파티에 왔던 그 많은 사람들 중 유일하게 초대장을 받았으며 또 유일하게 개츠비의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이다.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도 사랑을 끝까지 지키려는 개츠비를 늘 옆에서 지켜보고 그 진가를 알아준 단 한 명의 인물이다. 위대한 인생이란 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만 명의 사람들이 가식적인 칭찬 혹은 원색적인 야유를 하는 것에 휘둘리지 않고 단 한 명이지만 진정으로 위대함을 알아주는 자가 있을 때 완성되는 것이 아닐까. 우연이든 필연이든 닉은 개츠비의 곁에 있었고 그를 ‘위대한 개츠비’로 인정해주었다.

개츠비는 삶의 가치를 찾고 이를 지키고자 평생 노력했고 이런 자신을 인정해주는 닉이 곁에 있어 비극적으로 끝났지만 위대한 인생을 살았다. 그처럼 비극적인 결말을 맞고 싶지는 않지만 앞으로는 손 놓고 지금까지처럼 빈둥대며 살기는 힘들어지겠다. 머리 속에서 계속 <위대한 개츠비> 책의 내용과 함께 개츠비의 삶이 그려질테니 말이다. 과연 소용돌이치는 세상에서 내가 지키고 싶은 신념, 가치는 무엇일까. 여기서부터 시작해 위대한 인생을 향한 한 걸음을 내딛어 봐야겠다.
지동섭 2015-11-29 추천(0)
[북리뷰공모] 두려움과 떨림
[북 리뷰 공모전] -[문화와 예술] 부문
융합에너지신소재공학과 지동섭

두려움과 떨림
-F. 스콧 피츠제럴드 『위대한 개츠비』

고전으로 남은 문학작품 대부분이 지닌 특징은 공시(共時)적인 면과 통시(通時)적인 면을 모두 잘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소설이 쓰인 당시의 문제의식을 잘 보여주면서도, 인생을 살면서 누구나 으레 고민하게 되는 질문을 함께 던진다는 것이다. 제인 오스틴(Jane Austen)의 『오만과 편견』, 레프 톨스토이(Lev Tolstoy)의 『안나 카레니나』 등의 작품들이 오늘날에도 사랑받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표면적으로는 인간이라면 평생 고민하게 되는 사랑 문제를 다루면서도, 그 내부에 당시의 사회상을 잘 간직하고 있는 소설들이다. F. 스콧 피츠제럴드(F. Scott Fitzgerald)의 『위대한 개츠비』도 그러한 면을 잘 보여주는 소설이다. 개츠비와 데이지의 로맨스를 중심으로 각 인물들의 엇갈린 사랑을 보여주는 한편, 대공황 바로 직전의 재즈 시대의 모습과 자본주의의 이면을 잘 드러내고 있다. ‘개츠비가 과연 위대한가’라는 질문의 해답은 이 두 가지 면을 포괄적으로 보았을 때 얻을 수 있다. 개츠비가 데이지를 사랑하는 방식과 개츠비가 1920년대에는 불법인 밀주 사업을 통해 재산을 축적하는 방식을 고려해보면 개츠비가 정말로 위대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혹자는 개츠비를 순애보적 인물로 평가하며 사랑에 있어서만큼은 위대한 인물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개츠비와 데이지의 사랑은 단순히 일방적인 사랑이 아니며, 오히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사랑 방식에는 일정한 패턴이 있다. 나는 이 점을 눈여겨보았다.
『위대한 개츠비』를 읽은 사람들 대다수가 지나쳐버린 이 소설의 가장 큰 특징은 개츠비에 관한 이야기를 개츠비 자신이 직접 말하지 않고 ‘닉’이라는 인물이 간접적으로 서술한다는 점이다. 소설은 형식과 내용이 함께 작용하는 장르이기에 1인칭 관찰자 시점이라는 특이한 시점은 내용과 관련지어 생각해보아야 한다. 닉이 개츠비를 대하는 태도는 개츠비가 데이지를 대하는 태도와 비슷하다. 예를 들어, 개츠비가 초록빛이 비치는 등대가 있는 강 건너편을 보듯이 닉이 개츠비의 정원을 바라본다. 닉은 마치 친밀해지고 싶은 대상과 거리를 두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을 나는 ‘친밀감에 대한 두려움과 떨림’이라고 말하고 싶다. 쇠얀 키에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가 『두려움과 떨림』에서 사랑에 관해 이야기 했듯이 사랑하는 대상 곁에 다가가고 싶지만, 이내 두려움을 느끼는 감정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이 사랑에 대한 ‘두려움과 떨림’은 『위대한 개츠비』에 나오는 각 인물의 관계를 잘 설명해준다. 닉과 다른 인물들과의 관계를 보면, 닉은 조던과 진지한 관계로 이어나가지 못하며 조던은 사랑에 빠져서 감정적으로 되기를 원치 않는다. 닉은 데이지를 대할 때도 친근함의 표현을 거의 하지 않는다. 친척인 데이지를 대할 때와 그저 옆집에 사는 친구 개츠비를 대할 때, 그리고 연인인 조던을 대할 때 닉의 태도는 엇비슷하다. 소설의 첫 장에 나오는 아버지의 충고를 듣고 닉이 취한 태도, “모든 것에 대해 판단을 미루는 버릇”은 친밀감에서도 드러난다. 그러나 닉뿐 아니라 데이지와 톰의 경우에도 사랑에 대한 두려움이 나타난다. 둘은 ‘결혼’이라는 형식으로 친밀감을 유지하려 하지만 서로가 가까이 다가가기를 두려워한다. 데이지는 톰과 더 가까워져서 그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을 두려워하며 그가 외도하도록 내버려둔다. 그러면서도 은연중에 그의 외도가 신경 쓰인다는 점을 주변 인물들에게 귀띔한다. 데이지와 개츠비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개츠비는 데이지를 갈망하면서도 섣불리 다가가지 않는다. 오히려 등대를 바라보듯이 멀리서 지켜볼 때가 많다. 데이지 역시 개츠비를 사랑했지만, 톰과 결혼했으며 개츠비가 다시 나타났을 때도 사랑 앞에서 망설이기만 한다. 이 소설을 비극적인 결말로 끝맺는 인물인 윌슨의 경우도 그의 아내와 사랑을 유지하려 하지만 그녀의 외도 앞에서 어쩔 줄 모르며, 오히려 외도의 상대방을 오해한다. 즉, 이 소설을 이끄는 ‘사랑’이라는 심리적 원동력은 소설의 결말처럼 비극적이다.
글머리에서 밝혔듯이 우리가 고전에 끌리는 이유는 『위대한 개츠비』에 시대상을 뛰어넘는 인간의 보편적인 질문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이 ‘사랑의 대상이 지닌 타자성’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사랑하는 상대방인 타자는 언제든지 나를 사랑하지 않을 자유를 지닌다. 이에 대해 장 폴 사르트르(Jean Paul Sartre)는 『존재와 무』에서 “사랑에 빠진 자가 원하는 것은 사랑받는 자가 자신을 절대적으로 선택해야 한다는 점이다”라고 말했다. 즉, 사랑에 빠진 사람은 상대방이 자신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자유가 없는 존재가 되길 바란다. 그러나 사랑은 오히려 상상된 상대방의 모습과 실재 타자의 모습이 불일치할 때 발생한다. 그래서 우리는 『위대한 개츠비』에 나오는 인물들처럼 사랑 앞에서 주저하게 된다. 이러한 사랑의 비극을 해결하기 위한 해답은 없을까. 알랭 바디우(Alain Badiou)는 『사랑 예찬』을 통해 사랑은 ‘둘’의 만남이라는 ‘사건’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점을 강조했다. 사르트르의 바람과 달리 사랑은 필연이 아니라 우연의 형식으로 나타난다. 이 분리된 ‘둘’은 ‘하나’라는 단일한 이데올로기에 공격을 가하는, 진리로 나아가는 ‘사건’이 된다. 사랑은 비극이 아니다. 사랑하는 대상을 향해 느끼는 ‘두려움과 떨림’이야말로 혼자 있다는 고독감에서 벗어나는, 타자를 받아들이고 진리를 드러내는 길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해야 한다.
김영석 2014-11-26 추천(0)
개츠비는 과연 위대한가
책을 다 읽고 나면 제목에 대한 의문이 남는다. 개츠비는 과연 위대한가. 혹자는 위대하다는 표현이 반어적 표현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극중 화자나 작가는 그가 정말로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리고 나 또한 이에 동의한다. 개츠비 주변에 등장하는 톰이나 데이지 그리고 개츠비의 파티에 불나방처럼 달려드는 그 시대의 사람들보다는,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벌지만 순수하게 사랑이라는 아름다운 이상을 추구하는 개츠비가 어찌 보면 더 '위대'해 보인다.

처음 작품을 읽었을 때는 이 작품이 왜 그리 유명한지 깨닫지 못 했다. 하지만 작품에는 온갖 부도덕한 행위가 대수롭지 않게 이루어지고 쾌락과 향락만을 추구하는 시대적 분위기가 정밀하게 잘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그러한 상황 속에서 맹목적으로 사랑을 추구하는 개츠비의 모습은 자연스럽게 대비된다. 작가는 작품의 주제가 지나치게 남녀의 애정과 물질적 성공에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에 "맙소사! 그것이 나의 소재이고, 그것이 내가 다뤄야 하는 전부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이 말이 문학작품은 꼭 심각한 주제의식을 지녀야 한다는 내 생각을 바꿔주는 계기가 되었다. 사실 사랑보다 더 깊이 있는 주제가 어디 있으랴. 작품을 읽다 보면 생각보다 시적인 표현이 많아 놀랍고, 그러한 표현을 찾아가면 읽는 재미 또한 쏠쏠하다.

"때때로 나는 마법에 걸린 듯 한 대도시의 황혼 녘에 주체할 수 없는 고독감을 느꼈고, 사람들에게서도 그런 느낌을 받았다. 가령 식당에서 외롭게 저녁을 먹을 시간을 기다리면서 쇼윈도 앞에서 서성대는 가난한 젊은 사무원들, 밤과 삶에서 가장 강렬한 순간들을 낭비하며 어스름 속을 헤매는 젊은 사무원들에게서 말이다."
-본문 중에서-
송강일 2014-11-18 추천(0)
1920년대 미국 사회의 자화상을 그린 작품
<위대한 개츠비>는 참 어려운 소설이다. 한 번 읽으면 괜히 읽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이 작품은 여러 번 읽을 수록 뭔가를 느낀다.
어떤 슬픔내지는 체념같은 게 느껴진다고 말할 수 있을까...
중서부출신인 닉 캐러웨이라는 인물이 뉴욕에서 만난 개츠비에 대한 회상 형식으로 쓰여진 이 작품은 제 1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사회의 변화에 갈 길을 잃고 방황하는 사람들을 다룬 작품이다. 작가 피츠제럴드의 자전적 성향이 강한 작품이라고도 말해지는 이 작품은 현대 미국 문학을 논하는 데서 절대 빠지지 않는 작품이다.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한 가운데 지난 시대의 유산이 되어버린 도덕적인 엄격함이 무너지고 그 자리를 새로운 가치관이 비집고 들어오면서 부와 환락만이 모든 사회를 지배하는 혼란스러운 시대. 퇴폐와 허영과 기만이 넘치는 사회다. 한쪽은 풍요가 넘치고 다른 쪽은 빈곤이 넘치는 사회에서 개츠비는 사랑하는 데이지를 되찾겠다는 일념으로 사회에서 금지하는 위험한 일에 손을 대고 위험한 인물들과 사귀면서 거부가 된다. 그러나, 데이지에 대한 사랑이 진실이든 아니든 개츠비가 다시 찾고 싶었던 진실과 순수는 이미 사라진 시대다.
닉이 개츠비의 자택에서 만난 사람들은 하나같이 도덕성을 결여하고 있고 성공을 위해서 불법적인 일도 서슴지 않는다. 더구나, 그 사실을 감추려고도 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것은 어느 한 두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전체 사회에 퍼진 유행과 같다.
결국 개츠비의 꿈은 그저 한갓 꿈에 지나지 않았고 그의 죽음조차 꿈처럼 끝났다.
위선만이 가득한 사회에서 그의 파티에 참석하던 사람들은 그를 기억하는 것조차 꺼린다. 그는 잊혀진 존재가 되었고 닉은 실체없는 허무한 환락과 방탕의 뉴욕을 떠난다.
개츠비는 위대했을까... 여러 번 읽어도 잘 모르겠다. 데이지에 대한 개츠비의 사랑은 순수한 사랑이었을지 모르나, 그는 이미 톰과 결혼한 데이지를 만나기 위해서 성공한 부자가 되어야했고 불법적인 일을 통해서 이를 이뤘다. 그리고 자신을 알리기 위해서 매일 자신의 저택에서 의미없는 향락적인 파티를 열었다. 개츠비라는 인물 자체가 모호하기도 하지만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 대부분이 그러하다.
그렇지만 다른 인물들이 퇴폐에 물드는 이유가 단지 부와 환락때문이었지만 개츠비에게는 최소한 목적과 희망이 있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매일 밤, 개츠비의 저택에서 벌어지는 파티가 끝나고 나면 다음날 수북한 오렌지 껍질만이 쌓여있는 것이다.
화려한 파티의 진실은 돈과 위선, 거짓으로 점철된 신기루였다.
정봄비 2014-11-06 추천(0)
데이지 뷰캐넌.

이 소설은 관찰자 닉 캐러웨이에 의해 시작된다.
그는 자신의 사촌인 '데이지 뷰캐넌'을 아래와 같이 묘사한다.

' 황금같은 여자, 숨막히게 따스했다. 이 세상에 자기만큼 내가 보고싶었던 이가 없었던 것처럼. '

데이지는 더할나위 없이 행복해 보이는 여자다. 많은 돈, 상류층의 지위, 아름다운 외모, 황홀한 생활. 그러나 남편의 외도를 아무것도 아닌냥 눈감아버릴 정도로 물질에 집착하는 여성은 아니었기에 데이지는 닉에게 마음을 털어놓는다.

" 내 딸이 아름답고 멍청했으면 좋겠어. 그게 여자한텐 최선일테니까. "

데이지 뷰캐넌은 소설에서나 영화에서나, 미련을 버리지 못하게 만드는, 달콤한 매력을 가진 여자로 나온다. 미인에겐 과거가 있다고 했던가, 데이지에게도 뜨겁게 사랑했지만 헤어져야만 했던 옛 연인이 있었다. 남편인 톰과 과거의 연인인 개츠비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그녀는 결국 톰의 품에 안긴다. 혹자는 사랑보다 물질을 택한 여자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개츠비도 톰 못지않은 부호였기 때문이다. 다만 데이지는 개츠비에게서 확신을 얻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남편의 외도 외엔 안락한 현재의 삶을 버리고 개츠비에게로 간다는 것은, 바람난 여자라는 수군거림과 함께 더 이상 착하고 아름다운 여자로만 남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처음 소설을 읽고, 보게 된 영화 '위대한 개츠비'가 끝나갈 때 내게 데이지는 '왜 진짜 삶을 따라가지 않지?'란 의문을 들게 했다. 개츠비를 따라가는 것이 그녀의 진정한 삶이 아닐까 싶었기 때문이다. '왜 개츠비와 살겠다는 결단을 내리지 못한 걸까, 바보같은 여자!'란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나는 데이지가 개츠비를 선택해야 했다고 생각한다. 그 둘이 후에 행복하든, 행복하지 않든 -내가 만약 데이지라면- 가장 후회없는 선택일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