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공모] 두려움과 떨림
[북 리뷰 공모전] -[문화와 예술] 부문
융합에너지신소재공학과 지동섭
두려움과 떨림
-F. 스콧 피츠제럴드 『위대한 개츠비』
고전으로 남은 문학작품 대부분이 지닌 특징은 공시(共時)적인 면과 통시(通時)적인 면을 모두 잘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소설이 쓰인 당시의 문제의식을 잘 보여주면서도, 인생을 살면서 누구나 으레 고민하게 되는 질문을 함께 던진다는 것이다. 제인 오스틴(Jane Austen)의 『오만과 편견』, 레프 톨스토이(Lev Tolstoy)의 『안나 카레니나』 등의 작품들이 오늘날에도 사랑받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표면적으로는 인간이라면 평생 고민하게 되는 사랑 문제를 다루면서도, 그 내부에 당시의 사회상을 잘 간직하고 있는 소설들이다. F. 스콧 피츠제럴드(F. Scott Fitzgerald)의 『위대한 개츠비』도 그러한 면을 잘 보여주는 소설이다. 개츠비와 데이지의 로맨스를 중심으로 각 인물들의 엇갈린 사랑을 보여주는 한편, 대공황 바로 직전의 재즈 시대의 모습과 자본주의의 이면을 잘 드러내고 있다. ‘개츠비가 과연 위대한가’라는 질문의 해답은 이 두 가지 면을 포괄적으로 보았을 때 얻을 수 있다. 개츠비가 데이지를 사랑하는 방식과 개츠비가 1920년대에는 불법인 밀주 사업을 통해 재산을 축적하는 방식을 고려해보면 개츠비가 정말로 위대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혹자는 개츠비를 순애보적 인물로 평가하며 사랑에 있어서만큼은 위대한 인물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개츠비와 데이지의 사랑은 단순히 일방적인 사랑이 아니며, 오히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사랑 방식에는 일정한 패턴이 있다. 나는 이 점을 눈여겨보았다.
『위대한 개츠비』를 읽은 사람들 대다수가 지나쳐버린 이 소설의 가장 큰 특징은 개츠비에 관한 이야기를 개츠비 자신이 직접 말하지 않고 ‘닉’이라는 인물이 간접적으로 서술한다는 점이다. 소설은 형식과 내용이 함께 작용하는 장르이기에 1인칭 관찰자 시점이라는 특이한 시점은 내용과 관련지어 생각해보아야 한다. 닉이 개츠비를 대하는 태도는 개츠비가 데이지를 대하는 태도와 비슷하다. 예를 들어, 개츠비가 초록빛이 비치는 등대가 있는 강 건너편을 보듯이 닉이 개츠비의 정원을 바라본다. 닉은 마치 친밀해지고 싶은 대상과 거리를 두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을 나는 ‘친밀감에 대한 두려움과 떨림’이라고 말하고 싶다. 쇠얀 키에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가 『두려움과 떨림』에서 사랑에 관해 이야기 했듯이 사랑하는 대상 곁에 다가가고 싶지만, 이내 두려움을 느끼는 감정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이 사랑에 대한 ‘두려움과 떨림’은 『위대한 개츠비』에 나오는 각 인물의 관계를 잘 설명해준다. 닉과 다른 인물들과의 관계를 보면, 닉은 조던과 진지한 관계로 이어나가지 못하며 조던은 사랑에 빠져서 감정적으로 되기를 원치 않는다. 닉은 데이지를 대할 때도 친근함의 표현을 거의 하지 않는다. 친척인 데이지를 대할 때와 그저 옆집에 사는 친구 개츠비를 대할 때, 그리고 연인인 조던을 대할 때 닉의 태도는 엇비슷하다. 소설의 첫 장에 나오는 아버지의 충고를 듣고 닉이 취한 태도, “모든 것에 대해 판단을 미루는 버릇”은 친밀감에서도 드러난다. 그러나 닉뿐 아니라 데이지와 톰의 경우에도 사랑에 대한 두려움이 나타난다. 둘은 ‘결혼’이라는 형식으로 친밀감을 유지하려 하지만 서로가 가까이 다가가기를 두려워한다. 데이지는 톰과 더 가까워져서 그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을 두려워하며 그가 외도하도록 내버려둔다. 그러면서도 은연중에 그의 외도가 신경 쓰인다는 점을 주변 인물들에게 귀띔한다. 데이지와 개츠비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개츠비는 데이지를 갈망하면서도 섣불리 다가가지 않는다. 오히려 등대를 바라보듯이 멀리서 지켜볼 때가 많다. 데이지 역시 개츠비를 사랑했지만, 톰과 결혼했으며 개츠비가 다시 나타났을 때도 사랑 앞에서 망설이기만 한다. 이 소설을 비극적인 결말로 끝맺는 인물인 윌슨의 경우도 그의 아내와 사랑을 유지하려 하지만 그녀의 외도 앞에서 어쩔 줄 모르며, 오히려 외도의 상대방을 오해한다. 즉, 이 소설을 이끄는 ‘사랑’이라는 심리적 원동력은 소설의 결말처럼 비극적이다.
글머리에서 밝혔듯이 우리가 고전에 끌리는 이유는 『위대한 개츠비』에 시대상을 뛰어넘는 인간의 보편적인 질문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이 ‘사랑의 대상이 지닌 타자성’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사랑하는 상대방인 타자는 언제든지 나를 사랑하지 않을 자유를 지닌다. 이에 대해 장 폴 사르트르(Jean Paul Sartre)는 『존재와 무』에서 “사랑에 빠진 자가 원하는 것은 사랑받는 자가 자신을 절대적으로 선택해야 한다는 점이다”라고 말했다. 즉, 사랑에 빠진 사람은 상대방이 자신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자유가 없는 존재가 되길 바란다. 그러나 사랑은 오히려 상상된 상대방의 모습과 실재 타자의 모습이 불일치할 때 발생한다. 그래서 우리는 『위대한 개츠비』에 나오는 인물들처럼 사랑 앞에서 주저하게 된다. 이러한 사랑의 비극을 해결하기 위한 해답은 없을까. 알랭 바디우(Alain Badiou)는 『사랑 예찬』을 통해 사랑은 ‘둘’의 만남이라는 ‘사건’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점을 강조했다. 사르트르의 바람과 달리 사랑은 필연이 아니라 우연의 형식으로 나타난다. 이 분리된 ‘둘’은 ‘하나’라는 단일한 이데올로기에 공격을 가하는, 진리로 나아가는 ‘사건’이 된다. 사랑은 비극이 아니다. 사랑하는 대상을 향해 느끼는 ‘두려움과 떨림’이야말로 혼자 있다는 고독감에서 벗어나는, 타자를 받아들이고 진리를 드러내는 길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