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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
오이디푸스 왕과 안티고네
저자
Sophocles
발행처
계명대학교출판부
발행년도
1998
ISBN
8975851494 

리뷰

강준구 2015-11-30 추천(1)
[북리뷰공모] 오이디푸스 왕과 안티고네를 읽고


거부, 그 슬프지만 아름다운 이야기



- 오이디푸스 왕, 안티고네를 읽고



 



 



이야기의 큰 흐름, 거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엘렉트라 콤플렉스와 함께 심리학이 대두된 이후(프로이트와 융 이후)로 끊임없이 우리에게 많은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에 흔히 회자되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같은 이야기들은 원래를 유래를 숙고해본 깊이 있는 이야기라기보다는, 그 피상적인 내용을 인지하여 그냥 쉽게 이야기할 수 있는 가십거리정도로 여기고 있는 것이 분명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신화’와 연관되어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들은 그 나름대로 깊게 전하고자 하는 바가 있습니다.



여기서 제가 말하고 싶은 ‘오이디푸스 왕’과, ‘안티고네’의 이야기는 앞서 설명한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신’과 함께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들의 이야기를 풀어냄으로써, 그 전하고자 하는 바를 분명히 제시합니다. 각각 독립적으로 분석한다면, 통념적으로 설명해서 오이디푸스 왕은 운명에 순응하는 것과 그렇지 않는 것의 대결, 그리고 안티고네의 이야기는 법과 인간 기본 윤리의 대결 정도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둘의 이야기에서는 각 이야기의 주체가 하는 ‘거부’라는 행위를 통해서 풀어져 나가는 큰 흐름이 존재합니다.



 



나는 끝까지 운명에 순종하지 않았다



오이디푸스 왕(의 이야기)은, ‘아버지를 죽이고 어미를 취할 것’이라는 신탁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인간들의 이야기가 시간상(소설 기술상이 아닌 실제 사건 진행상) 가장 먼저 진행된 이야기입니다. 이 선행 이야기에 따르면 오이디푸스의 아버지(친부)는 자신의 아들이 자신을 죽인다는 신탁을 듣고, 자신의 아들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물론 오이디푸스는 죽지 않고 양부에게 길러져 살아남았습니다. 그러나 운명(신)은 야속하게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려는 오이디푸스에게도 같은 신탁을 내립니다. 그래서 오이디푸스는 그러한 신탁에서 자유롭고자 자신의 부모님(자신이 친부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양부)에게서 벗어나 테베의 왕이 될 때까지 떠돌아다닙니다. 하지만 결국 신탁은 이루어지게 되었고, 오이디푸스는 스스로를 벌하게 됩니다.



위의 이야기를 운명에 순응하지 않고 주체성을 보이려는 사내의 절망적인 결말이라고 보는 것은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다만, 저는 이 이야기에는 약간의 다른 식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것을 조심스럽게 말해볼까 합니다.



오이디푸스의 삶은 다분히 의지적이고 주체적이었습니다. 야속한 운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는 젊은 시절을 자신의 부모님(양부) 곁에 있지 못하고 떠돌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국 그의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했습니다. 여기까지는 모두 신탁대로 진행되었습니다. 신탁대로 모든 일이 진행되고, 죄를 저지른 자가 자신이라는 것이 밝혀지자, 결국 그는 신탁에서 말해진대로, 자신이 그 신탁대로 행하겠노라고 공언한대로 추방을 선택합니다. 그 신탁의 내용은 “추방을 통해, 아니면 살해로써 살해를 다시 풀어 정화하라……” 라는 내용 이었는데, 결국 신탁대로 추방을 당한 것 입니다. 하지만, 오이디푸스는 오이디푸스 왕이란 책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도 잊지 못할 짓을 한 가지 더 저지릅니다. 바로 어머니의 금 브로치로 자신의 눈을 여러 번 찔러 장님이 되게 한 후에야 테베에서 추방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큰 틀에서 추방이란 사실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추방당하는 방식(눈을 멀게 한 후 추방당한다)은, 신이 제시한 벌보다 자신에게 조금 더 가혹합니다. 신탁대로만 흘러가는 와중에서의 의외의 행동, 이러한 행동은 어쩌면 ‘거부’라는 의미의 연장선에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러한 결말에서 비록 신탁대로 흘러갔지만, 비록 작은 행동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운명을 순종하는 것에 대한 거부하고 있구나, 라고 인식했습니다.



자신에 운명을 거부하며 살아왔다는 삶을 철저하게 부정당하고, 그리고 그 마지막에 깊은 절망 속에서 찌른 눈. 그가 의지적으로 찔렀든, 혹은 너무 절망해서 의지와 상관없이 찔렀든, 신탁에 나오지 않았던 행위 하나가 ‘운명에 대한 순종을 거부’하는 삶을 살았던 그의 삶을 마지막까지 빛나게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조금은 지나친 생각일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저가 속으로 ‘끝까지 거부하라고 오형!’이라는 응원을 했기 때문에 저렇게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분명한 슬픔이지만, 신탁에 들어있지 않은 이 하나의 행동은, 제 생각에는, 분명하게 오이디푸스의 인간다움(주체적)을 빛나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모두 미워하기보다는 모두 사랑하게끔 타고났어요



안티고네의 이야기는 먼 과거에 쓰였지만, 역설적이게도 현대로 올수록 이야기가 갖는 의미는 더욱 많은 생각들을 야기하고 있습니다. 안티고네는 법적으로 나라의 원수인 사람을 자신의 오라버니라는 이유로 국법을(왕령)을 어기고 장사지내줬습니다. 물론 그 당시의 사회에서 장사를 아니 지낸다는 것은 정말 인륜적이지 못한 일이라는 통념도 안티고네에게 작용 됐겠지만, 그 중심의 이야기만을 끄집어 본다면, ‘국법 vs 인간 기본 윤리(라고 생각되어지는 것)’ 의 대결 구도만이 남는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윤리에 ‘기본’이 붙은 것은 다름이 아니라, 윤리를 ‘법을 준수한다’와 같은 의미 이전에 원초적인 영역에서 생각해보자는 의미입니다.



안티고네가 오라버니를 매장한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크레온(해당 법을 공포한 왕), 에게 “저는 모두 미워하기보다는 모두 사랑하게끔 타고났어요.”와 같은 말을 하면서 오라버니니까 매장한다, 신이 정해주신 가족끼리 사랑하라는 것이 법보다 우선한다(중세 이후의 사고방식에 따르자면 기본 윤리)라는 사고방식으로 법에 대한 순종을 거부했습니다.



이는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때보다 법이 더 많아진 현대 사회(물론 법을 제정할 때의 논의도 많아졌지만)에서 법과 인간 기본윤리가 충돌하는 상황이 왔을 때 우리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요? 아니, 이걸 생각하는 저 스스로는 저렇게 단호한 결정을 내릴 수 있을는지 과연 의심스럽기까지 합니다. 간단하게 인간 나고 나라 났지 라는 식으로까지 해석할 수도 있는 저 심리는 국내외의 ‘정치’와 ‘입법’에 대한 현실들을 생각해보게 합니다. 수평적이라기보다는 어떤 의미에서는 더욱 수직적인 구조를 띠어가는 현실인데, 이런 대치 상황에서 우리는 어떤 고민을 하고, 과연 그 고민에서 단호한 선택을 할 수 있을까요?



크레온왕 입장에서는 ‘매장하지 아니 한다’라는 말의 의미는 국가공공의 적에 대한 처우입니다. 따라서 크레온과 안티고네, 둘 사람 중에서 어떤 행동이 더 옳은가를 논한다는 것은 조금 어폐가 있는 말입니다. 각자의 이유가 있는 행동들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법에, 남성에, 권위에 대한 무조건적인 순종을 보이는 이스메네와는 달리 ‘법에 대한 순종을 거부’하는 행동을 한 안티고네의 행동에서 조금 더 인간의 주체적인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은 왜 일까요.



 



아름다움, 거부라는 슬픈 이야기의 끝



위 두 이야기의 결말은 의심할 여지없는 ‘비극’입니다. 적어도 저는, 주인공이 장님이 되어 삶을 부정당한채로 추방당하는 이야기와, 주인공이 죽는 이야기는 비극으로밖에는 인식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도 모든 이야기가 어딘가에 맹목적으로 순종하는 것을 거부하려는 사람들의 아니 좋은 말로를 나타낸다고 생각하니, 어딘가에 순종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라는 생각까지도 듭니다. 그러나, 이러한 큰 비극 속에서 마음을 울리는 작은 행동과 작은 목소리는 이 두꺼운 책을 뚫고 튀어나와 제 마음을 흔들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어딘가에 맹목적인 순종을 거부한다.’ 두 눈을 잃은 한 남자와, 생을 잃은 한 여인의 외침은 그렇게도, 슬프고, 그렇기에 더욱 아름다운 외침이었습니다.



‘거부’를 누군가에게 하길 권하기엔 이 책들에게서 얻는 ‘거부’의 느낌은 너무도 힘들고 슬픈 일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둠속에서 은은하게 빛을 내는 촛불처럼, ‘거부’라는 이름은 그 자체로 조금은 따듯하고, 조금은 주위보다 밝은 빛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아마도, 절대 진리는 아니겠지만, 현대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조금은 생각해 볼 거리가 되지 않을까 조심스레 생각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