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뢰딩거의 사이보그
<호모사피엔스씨의 위험한 고민>을 읽고
2016110702 법학과 박찬미
“현존하는 우리의 가장 큰 위협은 아마도 인공지능일 것입니다. 우리는 매우 신중해야 합니다.
그것은 악마를 소환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소환사는 악마를 컨트롤 할 수 있다고 확신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죠.”
일론 머스크, 2014년 MIT강연에서
나는 소위 말하는 '아날로그적인' 사람이다. 첨단기기의 지나친 발전을 두려워하고, 로봇이 인간을 대체하는 모습을 견디기 힘들어 한다. 그러나 사회를 역행할 만한 힘을 가지고 있지 않는 한, 나는 이런 사회 속에서 적응하여 최대한 행복하게 살아남아야만 했다. 내가 택한 생존수단은 과학과 기술을 최대한 이해하는 것—무조건 수용한다는 의미는 아니다—이었다. 따라서 '인문과 과학의 융합'을 고민하는 이번 독서는 나에게 큰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내가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롭게 읽은 부분은 로봇・사이보그・인공지능의 권리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 중에서도 인간과 무서운 속도로 닮아가는, 심지어 인간 고유의 영역이라 느껴졌던 감정마저도 갖게 되는 사이보그의 인권에 대해서 꽤 오랜 시간 고민을 하게 된 것 같다.인권에 관심이 많은 나에겐 우주산업이나 원자력발전중단 문제보다 현실성 있게 다가온 문제였다. 우리는 이미 수많은 사이보그들과 공존하고 있으며, 앞으로는 더 많은 ‘그들’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천부적 권리를 주장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동물의 권리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동물의 권리는 오늘날에 이르러 당연시되는 지위를 얻게 되었다. 이런 인간이 사이보그에게 유독 냉철할 거란 보장은 없다. 우리는 사이보그를 고민하고, 연구하며 그들의 권리를 주장하게 될 거다. 또 그들 사이사이의 우리에 대해서 고민하게 될 것이다. 인간은, 역설적이게도, 사이보그가 대두될수록 인간 스스로에 대한 질문을 하기 시작한다. 현재 인문학이 큰 인기를 얻고 있는 것이 어쩌면 우리가 사이보그와 공존하기를 인정하기 시작했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첫 번째 고민해야할 문제는 인간과 사이보그 사이의 지위이다. 마음 놓고 통크게 사이보그와 인간을 대등한 존재로 놓자는 생각은 정말 위험하다. 탄생부터 사이보그와 인간은 대등한 위치가 아니다. 능력면에서는 사이보그가 인간보다 우위에 있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자유시장경제질서를 따르고 있는 사회속에서 능력의 우위는 막강한 권력으로 발현되기가 마련이다. 능력도 자본의 일종이 되었으니 말이다. 이런 사회에서 인간은 언제까지 사이보그의 창조자로서 살아갈 수 있을까?
또한, 사이보그가 권리를 갖게 된다면 우리사회는 근본이념부터 큰 위기를 맞게 될거다. 자유민주주의는 대등한 개인과 개인의 관계를 전제로 성립한 이념이다.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이념을 따르고, 헌법에 따라 이념에 부합하는 국가구조를 만들었다. 사이보그의 권리인정은, 앞서 언급했듯이, 대등한 존재로 구성되어있다는 자유민주주의의 기본전제를 무너뜨리고, 기존 법질서에 큰 혼동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사이보그의 살인행위의 책임을 누구에게 물을 것인가(형사법)와 사이보그는 재산으로 취급되는가, 혹은 사이보그 또한 재산을 소유할 수 있는가, 상속의 대상이 되는가(민사법) 등의 기본적 문제만 생각해도 우리의 미래는 꽤나 골치 아파질 것 같다.
국가내에서 뿐만이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큰 문제를 야기할 것이다. 국제법의 혼란은 물론이고, 사이보그의 우월성은 곧 국가의 자본—지금의 인적자본처럼—이 되어 발달된 사이보그 기술을 소유하고 있는 국가와 그렇지 못한 국가는 기존의 경제적 격차심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농후하다.
사이보그는 인간의 창조물이다. 우리는 그들에 대해서 책임을 질 의무가 있다. 《프랑켄슈타인》에서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창조한 몬스터의 대사가 우리에게 그 사실을 다시한번 상기시켜준다.
“나를 만든 것에 책임을 다하시오. 그렇지 않으면 통제 불능이 무엇인지 보여주겠소.”
“나에 대한 의무를 다하시오. 나는 당신의 너그러움과 애정을 받아야 하오. 나는 당신의 피조물이잖소. 나만 영원히 기쁨을 누리지 못할 수는 없소.”
이와 동시에 기억해야할 점은, <특이점이 온다>의 저자 레이 커즈와일이 주장한 바와 같이 언젠가 우리는 사이보그에 의해서 추월될 거라는 사실이다.1) 누군가는 이러한 미래를 실현가능성 낮은 최악의 상황이라고 안일하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주장을 하기엔 우리는 너무 멀리 왔다. 너무나도 많은 것들이 우리가 새로운 시대를 맞이할 것을 암시해주고 있다. 이런 사회에 대한 고민은 과학자만의 것이 아니다. 우리가 과학과 기술에 의한 편의를 제공받고 누리고 있는 한, 미래사회 시민으로서 우리는 그들―다양한 과학과 기술―이 가져올 위험도 감수할 준비를 해야한다. 우리가 이러한 미래를 외면하고 고민하지 않는다면, 한스 요나스가 말하던 윤리적 공백은 더욱 심화될 것이다.
우리는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재설정하는 과정에 있다. 슈뢰딩거의 사이보그의 생사(生死)는 이미 결정났다. 우리는 이미 사이보그를 경험했기 때문이다.2) 그들은 살아서, 우리와 공존하고 있다. 미래의 구성원으로서 존재하는 한, 우리는 자연과학적 지식을 기반으로 미래사회는 어떤 모습을 띠어야 하는가를 고민하기 위해서 인문학을 끊임없이 공부해야할 책임이 있다.
1)“2029년, 인공지능・나노공학・생명공학 등의 발전으로 기계는 인간의 지능에 필적 혹은 추월하며 2045년, 기계의 지능이 인간 지능을 완전히 뛰어넘을 것이다.”
2)슈뢰딩거의 고양이의 변용. 양자역학에서 적용되는 개념이지만 비유로서 사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