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추천
바틀비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니, 어쩌면 우리가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려고 하는 것 같다. 그는 자신이 '까다로운 것은 아니다'라고 했고 그저 지금 하고 싶은 말을 수동적으로 표현했을 뿐이다. 작가가 무엇을 의도했건 간에 그는 그저 붙박이처럼 지내고 '싶었을' 뿐이다. 변호사나 바틀비나 안정적이고 싶어했고, 둘의 차이는 안정적이려고 하는 방식에서 달랐다. 변호사는 하고 싶음 보다 해야만 하는 적극적인 표현 방식이었고, 바틀비는 해야만 하는 것보다 하고 싶어하는 것을 하는 소극적인 표현 방식이었다. 이 둘은 똑같으면서도 달랐고, 그렇기에 변호사는 바틀비를 매몰차게 내쫓지 못하고 자신이 떠나가버린 것이라고 생각한다.
터키, 니퍼즈, 진저넛은 안정을 추구하지 않고, 고정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생기가 있지만 그 생기는 모순적이게도 변호사와 타협하고 해야만 하는 일을 함으로써 생겨나는 것이다. 이와 다르게 바틀비는 어떤 것에도 영향을 받지 않고, 키케로 석고 형상처럼 차분하고 한편으론 창백하며 순수한 고독과 절망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마지막 부분에 언급하는 내용을 통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바틀비는 워싱턴의 배달불능우편물 취급소에서 말단 직원으로 일하면서 수없이 '창백한 절망'과 마주한다. '삶의 심부름에 나선 이 편지들이 죽음으로 질주하는 것이다.'
처음에 필사를 열심히 했떤 바틀비가 필경사의 일을 점점 거부하다가 나중에는 '제왕과 만보백관과 함께'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보면 당시 월가라는 자본주의를 대표하는 공간에서 수없는 노동착취를 당했건,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아님을 깨닫건 간에 결국 그는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해야만 하는 일들을 아무리 열심히 해도 결국 '배달불능우편물처럼 죽음으로 향해간다는 걸 진작에 깨달은 것일까? 그렇다면 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얘기하거나 하고 싶은 다른 일들을 찾지 않은 것일까? 모든 삶의 부분은 죽음으로 치닫기 때문에 살아있는 모든 것이 부질없다는 막연한 비관주의는 아니라고 본다. 그저 자신만의 세계에서 살 수 있기 위해선 수동적 저항만이 유일했음에 그랬을 것이라 생각한다. 변호사가 바틀비를 쫓아낸 것이 아니라 '자기로부터 떼어놓았듯이' 바틀비가 바틀비로서 살아가기 위해선 죽음만이, 창백한 절망만이 필요했던 것이다.
인간은 사회 안에서 단절되고 분리된 채 살 수 없다는 무기력함과 동시에 사회에 배제됨을 당함으로써 살 수 있다는 아이러니함이 함께 공존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 회의적이거나 패배주의적인 평가만 하기보다는 오히려 수동적인 저항에 적극적인 전복성이 있고, 죽음 안에서 자신의 실존이 증명되고, 창백한 절망 속에는 누구보다도 평온한 희망이 있다는 점을 이 소설을 통해 느꼈다. 책을 읽으면서 단순히 재미를 느끼기 위하기보다 여러 번 읽게 만들고, 읽을 때마다 다양하게 생각해 볼 수 있는 책을 읽고 싶다면 자신있게 이 책을 꼭 읽어보라고 추천하고 싶다.